제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서 서부전선으로 배송된 식량의 양은 무려 324만톤에 달했습니다. 324만톤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난 양인 것만은 확실하지요. 덕분에 대전 초기, 영국군의 급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1인당
하루 배급량은 빵과 건빵 외에도, 280그램의 고기와 230그램의 채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채소보다 고기의 공급량이 많은
것을 보면 정말 영국인답지요 ? ( 영국인은 하루에 네끼를 먹었다 http://blog.daum.net/nasica/5561033 참조 )
이
당시 영국군의 주된 식량은 bully라고 불렸던 소금에 절인 쇠고기 깡통과 빵(또는 건빵)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나폴레옹 전쟁
때 스페인 전장에서 싸우던 영국군 병사가 배급받던 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의 입맛은 참 꾸준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지... 다만 쇠고기가 중대 단위로 커다란 나무통에 넣어져 배급되지 않고 한끼용 깡통으로 포장되어 대량
배포되었다는 것만 차이가 나는군요. 참고로, 양철 깡통이 발명된 것은 1820년대인데, 영국군이 정식으로 '깡통 야전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의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 때였다고 하니까,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의 식량 사정은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먹고 싶었어 ?)
문
제는 저 위에서 언급한 324만톤이라는 식량이, 영국을 분명히 떠나기는 떠났으나, 그렇다고 다 프랑스 항구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독일 잠수함 작전이 효과적으로 운영되면서 서부 전선의 영국군도 배가 고파지기 시작합니다.
1916년이 되면서, 고기 배급량은 280그램에서 170그램으로 줄어어들었고, 나중에는 최전선이 아닌 부대에 대해서는, 3일에
한번 꼴로 고기가 배급됩니다. 하지만 실제 병사들이 느낀 것은 이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는 떼먹는
모양입니다.)
리처드 비즐리라는 병사의 병사의 회고입니다.
"
훈련소에서의 식사는 괜찮았어요. 그러나 프랑스에서 우리는 그냥 굶었지요. 거의 차와 건빵만 먹고 살았다니까요. 일주일에 한번
고기를 받으면 굉장히 재수가 좋은 거였는데, 그것도 물이 가득찬 참호에서 선 채로 시체썩는 냄새를 맡으며 그걸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1916년 겨울부터는 순무를 말려서 갈아만든
가루로 빵을 만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군이 이 모양이었으니, 독일은 더 상황이 심각했지요.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읽어보면, 독일군 병사가 투덜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침은 순무 샐러드, 점심은 순무
커틀릿, 저녁은 순무 스튜에요." 이것말고도 "서부 전선 이상없다"에는 줄기차게 순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무를 갈아서 만든
빵이라든지, 순무를 삶아서 네조각으로 나누어 먹는 이야기라든지...
자꾸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군대와 무우는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단, 미군은 제외.) 심지어 삼국지에도 무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갈량은 어디에 주둔하든지, 약간이라도 장기 주둔할 기미가 보이면 진영 옆에 밭을 갈고 무우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시면 매우 그럴 듯 합니다.
"첫째, 무우는
성장이 빨라서 금방 키워 먹을 수 있다. 둘째, 신선한 채소가 부족하기 쉬운 식단에 무우만큼 영양을 공급해주는 채소가
드물다. 세째,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익혀서 먹을 수도 있다. 네째, 값이 싼 것이라서, 혹시 금방 진영을 옮기게 되더라도,
밭에 심은 것을 별로 아까와하지 않고 버리고 갈 수 있다."
그래서 촉나라가 있던 사천성 사람들은 무우를 '제갈채'라고 부르며 즐겨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장동건,원빈 주연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1.4 후퇴 당시 장동건이 흘린 통 속에서 떼굴떼굴 굴러가던 무우가 기억나는군요.
(스웨덴하면 ABBA 말고도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 스웨덴 순무 !)
다
시 1차세계대전으로 되돌아와서, 월남전 당시 미군의 대표적 식량 C레이션처럼, 영국군의 대표적 군용 식량으로 알려진 깡통 중에
Maconochie(머카너키라고 읽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스튜 통조림인데, 속에는 묽은 고기 수프에 감자, 순무와
당근이 둥둥 떠있었습니다. 이걸 먹어본 소감 역시 병사들의 회고록에 남아 있습니다.
"따뜻할 때 먹으면 Maconochie도 먹을만 하지만, 차가운 채로 먹으면 man-killer다."
(영어 읽기 귀찮으신 분을 위한 번역)
머카너키 요리법
1. 머카너키 깡통을 딴다.
2. 기름이 표면에 뜰 때까지 약한 불로 데운다. 떠오른 기름은 플란넬 천으로 살짝 적셔 걷어내고, 이 기름묻은 천은 나중에 쓰기 위해 한쪽에 치워둔다.
3. 깡통에서 시커먼 덩어리를 따로 꺼낸다. 이건 감자다. (역주: 오 마이 갓 !)
4. 아까 챙겨둔 기름묻은 천으로부터 프라이팬에서 기름을 짜내고, 그 기름으로 감자를 약한 불에 볶는다. (역주: 정말... 가지가지 한다 !!)
5. 건조 야채를 두 주먹 정도 석회맛이 나는 물로 잘 개어 팬케익 모양으로 뭉친다. 감자를 볶고 나면 그 다음에 이 건조 야채 물에 갠 것을 볶는다.
6. 나머지 스튜를 데워서 법랑 접시에 감자, 야채와 함께 담는다.
왜
갑자기 Maconochie 이야기를 했냐하면, 바로 위의 인용된 말 때문입니다. 즉, 대개 최전선에서는 차가운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야전 취사반을 가능한한 최전선 근처에 두려고 노력을 했으나, 취사반은 적의 대포 사정권에 들어가기를 꺼려했으므로,
결국 아무리 빨리 조리된 식사를 참호로 배달해도, 결국 참호 속에서는 찬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에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참호 속에서 차가운 Maconochie를 먹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돈을 거두어 작은 풍로를 사기도
했습니다. 특히 영국인답게, 아침에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연료가 없어서 그나마 별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특히 연기가 나는 젖은 짚이나 나무를 쓸 경우, 당장 적 포병의 타겟이 되었으므로, 연기가 안나고 불붙이기가 쉬운
고체 알코올이 가장 선호되는 연료였습니다.
(햇볕도 잘 들고, 바닥은 잘 말라 있고, 따뜻한 음식이 준비되고 있는 아늑한 참호... 아마 홍보용 사진인 듯)
아
뭏든, 영국군 당국이 신문에 '전선의 영국군 병사들은 하루에 뜨거운 식사를 2번씩은 공급받는다'고 발표했을 때, 분노한 병사들의
항의 편지가 무려 20만통이나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 여러분들 기억못하실 것 같은데,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 포클랜드를 방문한 대처 수상에게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 병사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내용은 (역시나 !) 형편없는 식량 공급에 대한 것이었고, 단적인 예로 '배급된 계란이 최소 2개월은 지난
것'이라는 불평이 신문에도 게재되어 한동안 영국이 시끄러웠습니다. 영국은 정말 첫째,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고, 둘째, 먹는
것에 대해 불평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
위에서 말한 대로, 나폴레옹 시대와 1차 세계대전 때와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 바로 건빵 ! ( 건빵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4723535 참조 ) 다음은 영국군 포병대의 프레시 일병이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건빵이 너무 딱딱해서 단단한 것에 올려두고 돌같은 걸로 내리쳐서 깨어 먹어야 해요. 한번은 건빵은 손에 쥐고 벽돌로 된 벽의 날카로운 모퉁이를 내리쳤는데, 손만 다쳤어요."
철도가 주요 운송 수단이고, 트럭이 굴러다니는 시대였지만, 역시 후방에서 구워진 빵이 전선에 도착하는데는 8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구글에서 뒤져보니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군용 건빵이라는데... 나비스코 건빵 ?)
주
류의 경우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사정보다 약간 더 나빠졌습니다. 1차세계대전 때도, 영국군은 여전히 럼주를 배급받았습니다.
이론상으로는 1인당 약 68ml, 그러니까 250ml짜리 콜라병의 1/4 정도를 받았는데, 주로 추운 겨울 아침에 배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추운날 아침마다 큰수저로 1~2스푼씩" 받았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이나 독일군은 좀더 넉넉하게, 매일 포도주나 브랜디 배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독
일군 상황은 어떨까요 ? 다음은 독일군 폰 아르민 장군의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여기서 나열된 식품은 '실제 보급된 물품'이
아니고 '요청된 물품'이라는 것에 유의하십시요. 지루한 참호전 속에서, 독일군이 용감하게 프랑스군이나 영국군 참호로 돌격을
했던 것은 그 참호에 굴러다니는 고기 통조림을 빼앗으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는 것이 "서부 전선 이상없다"에 나옵니다.
(독일군 배급 장면인데... 뭐 꼭 군대 배급소가 아니라 동네 아줌마들 시장에 장보러 나온 것 같네요)
"모든 부대들이 만장일치로 식량 배급의 증량을 요구하고 있다. 빵, 러스크빵, 소시지, 깡통제 소시지, 깡통제 돼지기름, 베이컨, 깡통제 혹은 훈제 고기, 거기에 담배도 원한다. 또한 음식을 데울 고형 알코올도 꼭 필요하다.
또
한 많은 곳에서, 커피, 차, 코코아, 생수 같은 온갖 종류의 음료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한편으로는 소금에
절인 청어는 갈증을 유발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배급품으로 판명되었다. 따뜻하고 건조한 날씨에는 주류의 배급은 불필요하다."
(러스크가 뭔가 했더니... 단 빵이구만 !)
(바다의 밀이라는 별명이 붙은 유럽인의 생선, 청어를 절여서 말린 것)
위
를 보면, 확실히 독일인은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 소시지와 돼지비계를 좋아한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 또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인용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거기서 어떤 노련한 병사가, 어디선가 새우 통조림을 몇개 훔쳐오자, 동료들이 기뻐하면서도
돼지비계 통조림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ㅎㅎㅎ
(진짜 당시 미군들이 먹었던 리비 쇠고기 깡통. 콘 비프란 소금에 절인 쇠고기를 삶은 것입니다.)
미
군이 마침내 서부전선에 투입되면서 서부전선 전체의 식량 사정이 확~ 바뀝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자료 화면과 함께 어떤
미군 병사가 회고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여전히) 물구덩이인 참호 바닥에서 발을 적시지 않으려고 고기 통조림을 참호 바닥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미국의 물량은 후덜덜하지 않습니까 ?
인
간은 과거를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중요 교과목에는 반드시 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요. 실제로 많은 역사가 되풀이되었고, 이는 특히 주식 시장에서 그렇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에드워드
챈슬러라는 영국 기자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정말 놀랍다. 어떻게 똑같은 덫에 한번도 빼먹지 않고 걸린단 말인가 !" 지금처럼 금융 위기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정말 와닿는 이야기지요. 나폴레옹을 둘러싼 역사에서도 그렇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정말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나
폴레옹 전쟁이라고 하면 원래 1803년 아미앵 평화조약이 깨지면서부터 1815년 워털루 전투까지의 12년간의 전쟁을 뜻합니다.
사실 이 전쟁은 프랑스 대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1793년 제1차 동맹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스페인 등 주동)서
시작되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이나 이집트 원정까지 포함하면 거의 20년 동안의 전쟁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이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해봐...)
생
각해보면 유럽은 항상 전쟁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전역, 유럽의 전 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가장 치열하고 '악랄'한 전투와 약탈이 벌어졌던 30년 전쟁도, 주무대인 독일을 초토화시켰을 뿐,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는 직접적인 전쟁 피해에 휘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또, 전국민들에 대해 동원령이 선포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들과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 특정 지역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전화에 휘말렸습니다.
-
이는 나폴레옹 특유의 발로 뛰는 야구...아니 전투 때문인데, 기차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의 전투치고는 정말 짧은 기간에 정말
넓은 지역, 그러니까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러시아까지, 북쪽으로는 덴마크부터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까지 유럽 대륙 전체가
전장이 되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 하에서의 유럽 지도)
2. 유럽 뿐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전세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전쟁은 지중해, 대서양은 물론 카리브해와 인도양, 심지어 태평양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또한 이집트, 시리아, 이오니아 해의 여러
섬 등 유럽에서 가까운 지역 뿐만 아니라, 인도 대륙과 북미 대륙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여러가지 형태의 대리전을 벌였습니다.
(왜 이 영화의 부제가 "세계 저 반대쪽 편에서"인지 아시겠습니까 ?)
3. 최초로 총력전의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
프랑스의 경우, 워낙 압도적인 적군을 상대하려다보니 근대 최초로 국민 개병제의 개념을 도입하여 징집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로써,
전쟁은 어느 영주 및 그 식솔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프랑스 전 국민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의
경우, 유럽의 군주국들을 부추겨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외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프랑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국의 돈줄, 특히 인도와의 통상로를 위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로 인해 바로 위에 들었던 점, 즉 전세계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전쟁과 그 이전 전쟁의 다른 점을 몇개 늘어놓고 보니까, 제2차 세계대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제2차 세계대전과 나폴레옹 전쟁과의 유사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득권 세력 vs. 독재 혁명 세력
제
1차 세계대전은 사실 고만고만한 욕심꾸러기 깡패들의 패싸움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당시 미국이나 영국이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에 비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없었지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면, 정말 독일은 악의 제국이고, 그에
맞서 싸운 영국이나 미국은 정의의 화신처럼 그려집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늘날 대표적인 세계 위인 중의 하나로 떠받들어집니다만, 당대에는, 적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프랑스인들로부터도 전쟁광에 독재자로 불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나폴레옹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영웅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케사르, 징기스칸 등도 모두 당대 적국 사람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정당한 민주 정권이었고,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오리지널 군사 독재 정권이었으니까, 족보를 따져보면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더 욕을 먹어야 합니다.
(쿠데타라는 말이 프랑스어라는 거 처음 알았어 ? 이 짓을 한 건 나지만 그 말을 만들어낸 건 영국놈들이야)
사
실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당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에 교묘하게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한 압박에다,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파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 상태였고, 어떻게든 그를 극복할 누군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히틀러는 반유태주의와, '게르만족의 정당한 권리'를 내세워
이를 실제로 극복했지요.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지만요.
(무슨 놈의 한자를 저렇게 많이 썼나... 무슨 권리를 요구한다고 ?)
어
쨌거나 당시 극심한 경제난과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탈하는 혁명적 과격 정권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그 세력의 전파를 틀어막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 이후 총재 정부의 혼란과 부패, 고질적인 재정 적자와 아시냐 지폐의 파탄 (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http://blog.daum.net/nasica/6862340 참조), 그리고 혁명을 꺾으려는 외국 군주들의 군사적 위협, 게다가 프랑스 국내의 왕당파들의 준동으로 인해 프랑스는 당시 절대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군사적 천재성으로 이 모든 위협을 한번에 해결해주었습니다.
(노골적인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한 전쟁, 이탈리아 원정 중 리볼리 전투)
문
제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자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 타국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인근 점령지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을 잔인하게 수탈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나폴레옹도 못지 않게 대륙의 유럽 국가들을 세금, 징집 및 전쟁
배상금의 명목으로 수탈했습니다. 특히 당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분할 점령되어 국가로서는 소멸 상태였던 폴란드의
경우는, 독립 국가로 재탄생시켜주겠다는 나폴레옹의 낚시에 걸려 '몸도 주고 마음도 주었지만' 결국 철저한 배신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폴레옹은 세계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고, 히틀러는 세계 악인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히
틀러가 욕을 먹는 점을 생각해보면, 유태인 학살, 비밀경찰, 게르만 극우 민족주의 등등 매우 많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사실 그
정도로 욕을 먹을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폴레옹도 비밀경찰을 운영했고, 언론 검열을 실시했으며, 노골적인 독재권력을
실시했습니다만, 유태인 학살이나 프랑스 민족 제1주의 등은 자행하지 않았지요. 사실 나폴레옹 휘하에는 그의 비전을 숭상하는
많은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폴란드인들이 복무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 행위에서 전범 행위에 해당하는 것들은 스페인 게릴라
전쟁에서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 행위 정도였습니다. 결국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 셈을 해보면, 히틀러가 저지른 온갖 악행과
나폴레옹의 악행은 비교가 안되지요.
(고야의 명작... 마드리드 5월 3일의 처형)
하
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닮은 점이 꽤 많습니다. 나폴레옹은 얼치기 작가적 소양이 있었고, 히틀러는 삼류 화가적 소양이 있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키가 좀 작았다는 점도 동일하네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대중 선동을 펼쳤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는 잘 아실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많은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은 다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가령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아래처럼 멋진 모습으로 넘었겠습니까
?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을 때, 볼 품은 없어도 안정적이고 지구력이 좋은 노새를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으흥...?)
(으흥 !!)
2. 대륙 세력 vs. 해양 세력
나
폴레옹이나 히틀러나 영국에 대해서는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사실상 유럽 전역을
제패하고 자신의 지배를 강요할 수 있었지만, 바다를 제패한 영국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독일 공군을 동원하여 영국
도시들을 불태웠던 히틀러가 그나마 분풀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지요. 결국 나폴레옹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나, 유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대륙 vs. 해양의 세력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 모두 결국 해양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뜻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제 생각에는 결국 전쟁은 총으로 한다기 보다는 돈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돈을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 결국 당시 부(富)는 유럽
대륙에서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해외 식민지로부터 수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17~18세기 들어 유럽이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유럽이 경제 문화적으로 더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무력이 더 강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결국 오늘날
유럽이 빛나는 문명을 이룩한 것은,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수탈한 부(富)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해외
식민지에서 자원을 쪽쪽 빨아들일 빨대, 즉 제해권을 가진 쪽이 결국 장기전에서는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뜬금없이 북아프리카는 왜 ?
나
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정말 특이한 공통점을 가집니다. 바로 북아프리카 작전입니다. 두 전쟁 모두 유럽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는데 정말 어이없게도 북아프리카 지역이 전화에 휘말렸던 것입니다. 왜 두 전쟁 모두 북아프리카를 그 시나리오에
포함시키게 되었을까요 ? 위에서 말한 점, 즉 대륙 vs. 해양의 대결이라는 점과 상관 있습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를 보지요. 독일이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작전을 펼쳤던 것은 우연과 필연이 합쳐진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독재자인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망상으로, 별 이유도 없이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본전도 못찾았던 것이 독일을 끌어들이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약간 망상이긴 했습니다만, 히틀러의 나름대로 원대한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즉, 한정된 자원 밖에 없던 유럽 대륙을
제패해봐야, 결국 영국의 물량전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히틀러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신생 터키
공화국을 압박하여 추축국 동맹에 끌어들이고, 더 나아가 남쪽으로부터 북진하여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지대를 점령한다는 꿈을 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왜 시작되었을까요 ? 이것도 놀랄 만큼 히틀러의
망상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표면적 대의명분은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로부터 이집트 민중을 해방시킨다든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로
문명을 되돌려준다든지 하는 터무니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개인의 야욕과 프랑스 총재 정부의 무모함이 합쳐진
결과이기는 했습니다만, 대신 당시 프랑스인들의 낭만주의와 창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역시 독일보다는 프랑스인들이
문화적으로는 더... (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져간 두가지, 대포와 OOO ?http://blog.daum.net/nasica/6862354 참조)
(근데 우린 여기 왜 온거야 ? 좀 뜬금 없쟎냐 ?)
나
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현실적인 (사실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만) 이유는 히틀러와 비슷했습니다. 즉, 영국의 돈줄이었던
인도로 가는 길을 닦겠다는, 오히려 히틀러보다도 더 황당하고,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에 문명을 되돌려준다는 표면적 대의명분보다도
더 어이없는 계획이었지요. 사실 나폴레옹은 소년 시절 읽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인도까지 도달하여 불멸의 영광을 이루고 싶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같은 대인물이 그런 황당한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지 않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오버질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랬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결국 영국의 육해군에 의해 그 꿈이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히틀러는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에서, 나폴레옹은 시리아의 생 장 다르크(아크레)에서 영국군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히틀러나 나폴레옹 모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영국의 로열 네이비였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저 생 장 다르크 요새 속에는 영국군 뿐만 아니라 내 사관학교 시절 원수 펠리포도 있단 말이다 !!!)
4.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히
틀러를 패배시킨 것은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었을까요, 피로 떡칠을 한 소련과의 동부 전선이었을까요 ? 나폴레옹을
결국 무너뜨린 것은 웰링턴 공작의 스페인 반도 전쟁이었을까요, 추위와 굶주림의 악몽으로 가득찬 모스크바 원정이었을까요 ?
정답은 이미 다 아실 것입니다. 영미 위주의 역사 교육과 영화, TV 드라마 속에서 성장한 우리들은 어릴 때는 모두 전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정답은 두 경우 모두 후자라는 것을 이제는 아실 것입니다.
히
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왜 러시아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는 그냥 간단히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어에 딱 잘
어울리는 숙어가 있지요. 'Bite more than you can chew' (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베어물다) 입니다.
(와... 러시아가 넓기는 넓다)
사
실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은, 왜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씹기에는 너무 컸던 러시아에 쳐들어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경우, 정권의 태생적 속성상, 어차피 파시스트 정권과 공산주의 정권 사이에 평화란 있을
수 없는 것으므로, 좀더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는 좀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목을 조르기 위해 내린 대륙 봉쇄령을 러시아가 어기고 있어서, 동부 유럽으로부터 영국산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갔다가는 어차피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말라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폴레옹은
그 주체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갈증 때문에, 러시아로 쳐들어갔다고들 합니다. (심지어 당시 나폴레옹을 직접 수행했던 수하
장성들도 감히 나폴레옹 면전에서 그렇게 투덜거렸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나름대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다만
장기판에서의 상황을 한 수 더 내다볼 줄 알았기에, 러시아를 침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대부분의 전투는 방어적 성격이었을 뿐, 한번도 순수한 침략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은 없었다고까지 분석하더군요.
(Franseschi 장군과 Weider라는 역사가가 쓴 "The Wars Against Napoleon"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읽었습니다. 나중에 읽는 대로 정리해서 올리지요.)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여름철 러시아의 진흙탕 바다와, 겨울철 러시아의 눈보라에 혼쭐이 난 이야기를 하면 사족이겠으므로 여기서
생략하시지요. 다만, 히틀러가 러시아에 쳐들어간 이유 중 하나가, '나폴레옹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내겠다'라는 개인적인
허영심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아 망했어요 망했어)
이
렇게 비교를 해보면, 정말 닮은 점이 많지요 ? 적어도 히틀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을 테니까, 나폴레옹의 패망 이유도 잘
알고 있었을텐데, 그와 비슷한 길을 걷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의아하기도 합니다. 알면서도 당한다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일까요 ?
위
사진 속의 전함은 20세기들어 가장 유명한 영국 해군 전함 중 하나인 워스파이트 (HMS Warspite) 호입니다. 영국
해군 전함 중 가장 유명한 전함은 아마도 후드 (HMS Hood) 호일 것입니다만, 그건 비스마르크 호에게 한방에 당했다는
불명예 때문이니, 그건 빼고 이야기하지요.
워스파이트 (Warspite) 호는 다음 두가지 점에서 20세기 초반 영국 해군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모두 몸으로 겪어낸 역사의 산 증인
2. 정점에 달했다가 몰락하는 영국 해군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
워
스파이트 호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해전인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여 독일 대양함대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지중해와 태평양 작전에도 모두 참여하여 독일 공군의 유도 폭탄인 FritzX를 3방이나 얻어맞기도 했지만 끝끝내
침몰하지 않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참고로 이탈리아 전함 로마 호는 단 두방의 FritzX에 침몰...)
(코드네임 FritzX, 정식 명칭 FX1400)
워
스파이트 호는 얻어맞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고, 노르웨이 연안 해전에서는 독일군 구축함들을 말아드셨고,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
해군 일소에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는 그야말로 포신이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 지원 포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중해 칼리브리아 해전에서, 이탈리아의 지울리오 케사레 호를 26,000 야드 거리에서의
명중시킨 것은, 움직이는 함정에서 움직이는 함정을 명중시킨 것으로는 역사상 가장 먼 거리의 명중탄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워
스파이트 호는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입니다. 한마디로, 영국 해군을 위해 만들어진 전함 중 당대 기준으로 가장 우수한 전함
클래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택에 디스커버리 채널의 Top10 수상 함정에도 올랐다는...) 배수량이 대략 3만톤인 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의 특징을 한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기존의 아이언 듀크 클래스급 전함보다 더 뛰어난 화력과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기존 장갑 능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
유는 2가지입니다. 먼저, 새로 개발된 15인치 주포를 장착하여, 기존의 13.5인치 포보다 포탑 수를 줄이고도 더 우월한
화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게를 줄여서 기존의 18개보다 더 많은, 24개의 보일러를 장착하여 기존 아이언 듀크
클래스의 21노트보다 더 빠른 25노트로 스피드도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보일러 수자를 늘렸다는 것만으로는 이렇게
고속 순양함에 해당하는 속도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중유(Fuel
Oil) 보일러였습니다. 당시 전함들의 보일러는 석탄을 연료로 움직였습니다. 중유도 사용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석탄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지요. 중유 보일러는 석탄 보일러에 비해 보일러의 무게 및 연료 무게도 더 가벼왔고, 출력도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기존 아이언 듀크급 전함의 총 출력이 29,000 마력인데 비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은 무려
56,000 마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누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만든지 알아 ? 바로 나야 나)
하
지만 퀸 엘리자베스급이 도면에서 그려지고 있던 1912년 당시 영국 해군성의 수장인 윈스턴 처칠 경은 선뜻 중유 보일러를 채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석탄은 많이 났습니다만 석유는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
시다시피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조명용으로 등유(kerosIne)를 사용했습니다. 이 등유는
처음에는 석유에서 정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풍부하게 채굴되었던 석탄을 정제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도 석탄을 정제하여 가솔린과 디젤을 뽑아내었지요. 그러다가 1850년대 들어서서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 및
미국 펜실바니아 쪽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석유를 증류하여 등유 및 중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860년대에는 세계 석유 생산량의
90%가 카스피 해 연안,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 인근에서 채굴되었습니다. 즉, 당시 유럽 세계에서, 석유의
주공급원은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동유럽 쪽이었습니다.
(1891년 바쿠의 유정들...)
석
유는 중동에서 나는 거 아니냐고요 ? 맞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벽을 쌓는데도 천연 타르가 사용될 정도로, 중동에는
석유가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산업용으로 사용될 만한 진짜 유전이 터진 것은 20세기 들어서서 입니다. 가령
쿠웨이트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은 1938년이었습니다. 중동에서 가장 먼저 산업용 유전이 발견된 곳은 페르시아, 즉
이란이었습니다. 바로 1908년이었지요.
(이란에서의 석유 시추 성공을 알리는 1908년 6월 3일자 편지)
타
이밍이 기가 막혔습니다. 바로 3년 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설계도가 그려질 때, 영국 해군에게 갑자기 페르시아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 경은 의회를 설득하여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의 지분 51%를 사들입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원래
페르시아 지역은 19세기 초까지도 영국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금쪽같은 인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반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남하하며 페르시아를 계속
건드렸는데,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굴복하여 프랑스 편에 서느냐 영국과 연합하느냐에 따라 페르시아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에게 있어 페르시아는 인도로 가는 길목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이
취역하게 되면서, 페르시아는 영국 해군에게 있어, 더 나아가 대영제국의 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1, 2차 세계대전 내내 페르시아는 영국과 소련의 간섭에 시달리며 반점령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체 유전을 가지고 있던 소련보다는 영국의 간섭이 훨씬 심했습니다.
신이 페르시아, 즉
이란에게 준 선물인 석유는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정작 별 혜택을 주지 못하고, 영국-페르시아(이란) 석유회사를 통해 서방 세계로
빨려나갔습니다. 과거에 처칠이 투자한 영국 자본 때문이었지요. 요즘 이라크 석유는 미국의 핼리버턴 사가 다 빨아간다면서요
? 그러다가, 마침내 이란에도 똑똑한 (혹은 멍청한) 정치가가 나타납니다. 바로 무하마드 모사데크 (Muhammad
Mosaddeq) 였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전 저 책 안 읽었습니다.)
이
양반은 팔레비 왕조 하에서 민족주의 세력으로 가득찬 의회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는데, 당연히 대단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이
양반이 정말 똑똑하다고 (혹은 멍청하다고) 했던 것은 1951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위해 만들어진 영-이란 석유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 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비틀거리느라 노쇠함이 역력했던 영국을 물로 봤던
것이었지요. 사실 제대로 봤습니다. 영국은 일단 헤이그의 국제 사법 재판소에 이 사건에 대한 소송을 올렸다가
기각당했습니다. 대단한 떡을 빼앗긴 영국은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격노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가 '천조국' 미국에게
이란을 침공하자고 길길이 뛰었지만, 당시 세계의 제왕이었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 경찰 미국이 그걸 허용할 수는 없다'며
영국을 말렸습니다. 당시 트루먼은 한국 전쟁으로 가뜩이나 골치아팠는데, 소련을 자극할 여력이 없었지요. 더군다나 영국만 좋은
일을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
(미국 대통령 트루먼. 이 사람은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하
지만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칠 때는 군대로만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영국은 미국에게 모사데크가 소련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모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이란의 영웅이 된 모사데크는 내친 김에 서방의 푸들이나 다름없던 국왕을 강요하여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사건까지 터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정말 이란이 소련 쪽으로 넘어갈 것을 두려워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CIA 작전명 에이잭스(Ajax)를 승인합니다. 이 CIA 작전에 따라 이란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함마드 레자
국왕이 복귀했고, 모사데크는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CIA가 벌인 공작은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무섭다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알바생 동원 ! 국왕 만세를 외치며 폭력 시위를 벌인 알바생들을 거리에 풀어댔던 것입니다. 이렇게
알바생을 동원하여 분위기를 조성한 뒤, 미리 매수해둔 일부 군 병력으로 모사데크를 체포한 것이지요. 당시 길거리 소요에서
희생된 알바생들의 주머니에는 동일한 액수의 지폐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CIA 요원들이 현장에서 알바생들에게 봉투를
나눠줬던 모양이더라구요.
아무튼 이렇게 영-이란 석유회사를 되찾은 영국은 미국에게, 이란 석유의 40%를 떼주는 것으로 댓가를 치뤄줍니다. 결국 모든 것은 돈으로 연결되는 거지요.
(이때 영국-이란 석유회사는 British Petroleum Company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름이 낯설다고요 ?
BP라고 하면 아마 좀더 익숙하실 겁니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결국 호메이니에 의한 이슬람 혁명, 이란 미 대사관의 인질 사태, 이란-이라크 전쟁, 9.11 사태,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자,
요즘 이란과 미국 사이가 다시 좋지 않습니다. 저는 이란에 핵무기가 있냐 없냐보다는, 이란에 석유가 많다는 사실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북한에서는 '내래 핵무기 만들었서라우'하며 아무리 떠들어봐야, 미국은 별로 신경을 안쓰쟎습니까 ?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전쟁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란과 미국 사이는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이렇게 세계적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글은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물리학박사이신 구상회박사님의 한국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고록입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해군본부로 파견근무중이던 1970년 9월1일부터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에서 근무를 시작해 26년이 지난
1996년 9월30일 국과연을 정년 퇴직했다. 국과연 창설요원으로 발령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20여년이 지났으니 새삼
세월의 빠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동안 보안을 이유로 묻혀 있던 국과연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러나 그중 많은
부분이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편견에 치우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지난 26년간 영광과 오욕으로 얼룩진 국과연의 역사를
지켜본 나였기에 기회가 오면 이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해오던 차에, 퇴직 후 주위 분들의 권유로 감히 펜을 들기로 했다.
국과연을 포함해 우리나라 방위산업과 율곡사업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제2경제 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吳源哲)씨의 『한국형 경제건설』 제5권에 상술돼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책과 중복되는 부분은 가급적 피하면서
한국형 미사일 개발에 얽힌 비화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본론인 미사일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국과연 창설 초기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미사일 개발은 70년대 초반 박대통령의
지시로 국과연이 주도해 이룬 성과였고, 따라서 당시 국과연의 설립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과연은 1970년 8월6일 대통령령 「국방과학연구소 직제」 공포와 함께 정원 60명의 국립 연구기관으로 탄생했다. 60년대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채택과 군비증강, 청와대 습격 및 울진·삼척 공비침투 등 북한의 무력도발 격화와 주한미군 철수 등 국내외의
숨가쁜 정세 변화로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낀 박대통령이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과연 설립을 결심한 것으로 안다.
초대 소장에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부소장이었던 신응균 장군이 임명됐고, 우선 육·해·공군사관학교에서 이공계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관으로 근무하던 장교 12명을 창설요원으로 파견 발령토록 했다. 당시 나는 해군본부에서 박철희 박사(현 인하대
교수)와 함께 대간첩선 모형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단 간판은 내걸었지만 국과연에는 무기를 연구 개발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국방부에도 개발할 무기의 소요
제기에서부터 연구, 개발, 생산, 배치 및 폐기에 이르는 일련의 무기순기관리(武器循期管理)에 대한 규정이나 전문가도 없었으니
문자 그대로 무에서 출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국과연은 우선 연구부서를 총포, 기동, 탄약, 함정, 로켓(유도탄), 통신 및
물자 등으로 나누고, 각 분야에 대한 연구과제, 연구실, 시험장 등을 포함한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을 작성하는 한편,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군의 공창과 주요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미국의 기술지원
경험도 없고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실효성 있는 중장기계획을 세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 소장은 미국의 무기 개발에
대한 기술 및 교육 등 지원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미 국무부와 대사관은
『KIST에서 무기를 연구하면 될 텐데 무엇 때문에 국과연처럼 무기를 전문적으로 연구 개발하는 연구소를 별도로 세우려고
하느냐』며 국과연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국과연에 오기 전 해군본부에 있을 때 미 첨단국방기술연구처(DARPA)의
패터슨 대령과 주한 미 해군사령관의 과학고문인 데이비스씨를 사귄 것이 인연이 돼 신 소장은 주한미군과의 기술협력 실무를 거의
나에게 맡겼다. 당시 신 소장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미 국방부로부터 국과연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패터슨 대령과 주한
합동미군사지원단(JUSMAG-K)을 통해 미국의 지원 가능성을 알아본 결과, 미 대사관측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국방부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패터슨 대령 등 미군 실무자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971년 6월1일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기술조사단이 내한했고, 결국 다음해인 1972년 1월7일 하딘(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 하는 미 기술지원단이
국과연에 상주하게 됐다. 전자전 전문가인 하딘씨는 국과연에 오기 전까지는 미 육군성 연구 개발 및 획득 차관보의 동남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다.
미 기술지원단 요원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씩 근무하면서 국과연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국과연이 기본병기 긴급 개발사업인
「번개사업」을 통해 육군의 기본병기를 단시일 내에 개발하고 양산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하딘팀의 도움이 컸다. 하딘과
이제는 고인이 된 얼릭(John Ulrich)씨는 미군 당국의 승인 없이 비밀 기술자료들을 무단으로 국과연에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겨 1974년 하딘팀은 해산되고 그 역할을 미 현역군인 위주로 편성된 JUSMAG-K에서 맡게 됐다.
이때부터 미국의 기술지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고 기술지원도 선별적으로 이뤄진 반면, 후에 국과연이 지대지 유도탄 등 민감한
사업을 추진할 때에는 지원보다는 오히려 연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하딘은 귀국 후에도 국과연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았다. 은퇴 후 그는 평생 모은 전자학술지를 국과연에 기증했을 뿐 아니라 국과연 창설 20주년 학술대회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참석해 특별 강연을 하기까지 했다.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또 한 사람으로 패터슨 대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
방위산업의 육성지원을 위해 국과연에 대한 기술지원의 당위성을 우리보다 더 열심히 미군 당국에 설명해준 분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과연 연구팀들이 기술자료를 복사하고 중장기 연구계획 등 각종 서류의 사본을 만드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제록스
복사기를 무료로 대여해주고 복사용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엔 미국 제록스사와 우리 정부 사이에 복사기에 대한 임대차계약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기관은 복사기를 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패터슨 대령은 자신의 사무실이 국과연에 있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 복사기를
제공한 것이다. 번개사업 중에는 매일 100쪽이 넘는 사업 보고서를 청와대, 국방부 및 관계기관에게 제출해야 했는데, 이
복사기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번개사업
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나는 소장의 지시로 공사 교관으로 있으면서 2.75인치 로켓을 연구하다가 국과연에 입소한 송문범 중령(순직)과 함께 대전차 및
대함 로켓, 대전차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연구실, 시험장, 연구장비, 인력 및 예산 등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을 세워
보고했다.
이렇게 각 분야에 걸쳐 연구기반 조성에 전력하던 1971년 11월9일 신 소장은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대통령의 긴급지시를
전달받았다. 연말까지 소총을 비롯해 기관총, 60밀리 박격포, 수류탄, 지뢰, 소형 고속정 및 경항공기의 7가지 무기를 시제
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청와대에서 문서로 시달된 내용은 (1)카빈 M2(10정) (2)M1소총 자동화 MX (2정) (3)경기관총 M1919
A4(5정) 및 M1919 A6(5정) (4) 60mm 박격포 M19(4문), 81mm 박격포 M29(6문) 60밀리 박격포
경량화(2문) (5) 3.5인치 로켓 포 M20 A1(2문) 및 M20 B1(2문) (6)수류탄 MK2(300발) (7)대인지뢰
M18 A1(20발), 대전차 지뢰 M15(20발)였으며 시제 기간도 1차는 12월30일까지, 2차는 1972년 1월부터 3월
말까지로 돼 있었다. 당시의 형편없는 산업 수준이나 창설된지 1년도 안 돼 기반도 아직 다지지 못한 국과연에 1개월 반 만에
그런 무기를 시제 개발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지시였다.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박 대통령의 긴급 무기개발 지시는 당시 국가안보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유관 부처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으리라 생각된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강력하게 추진키 위해 11월10일 청와대에
방위산업을 전담할 경제 제2비서실을 신설하고 수석비서관에 상공부의 오원철 차관보를 임명했다.
40일간 고군분투
초비상사태에 돌입한 국과연은 11월13일 긴급 무기개발 사업을 「번개사업」으로 명명하고 개발사업계획을 군의 작전명령 형식으로
작성해 연구부서에 시달하는 한편 상황실을 설치하여 날마다 보고토록 했다. 신 소장은 훈시를 통해 『번개사업은 대통령이 긴급
지시한 중차대한 사업으로 청와대 경제 제2수석이 직접 감독하고 통제할 것이며, 사업 성패가 곧 연구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니
사력을 다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는 번개사업에서 로켓포의 개발 책임을 맡았다. 도면이나 기술자료가 전혀 없는 실정이라 앞일이 막막했지만 우선 연구팀을 편성하고
40일간의 활동계획을 역순으로 작성했다. 업무를 대충 적어보니 40일 동안 집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월요일에 아예 옷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출근했다.
오수석은 수시로 개발실을 방문해서 사업 진행상황을 직접 파악했다. 연구소에는 밤새워 일하는 연구원들을 위해서 24시간 난방시설을 가동했고, 연구원들은 일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M20 A1과 M20 B1의 3.5인치 로켓 포 도면을 구하는 일이었다. 육군 병기감실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불가능하다는 회신이 왔다. M20 A1과 M20 B1의 주된 차이는 포신의 재료와 제조공법으로, A1은 발사관을 만들
때 알루미늄 합금을 압출하여 만들고 B1은 주조하여 만든다. 할 수 없이 육군 수경사(현 수방사)에서 운영중인 M20 A1과
M20 B1포를 1문씩 빌려와 이를 분해해서 구성을 파악한 후 부품을 스케치하고 치수를 정밀 측정해서 도면을 작성하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시작했다. 재질 분석은 빌려온 장비를 부술 수가 없어 육안 검사와 비파괴 시험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군에서 빌려온 로켓포는 오래 사용한 것이라 마모가 심해 정확한 치수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품 도면을 마무리짓고
조립 도면을 그려보니 서로 치수가 맞지 않아 며칠 밤을 새우고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은 전자 통신을
책임지고 있는 서정욱 박사(현 SK텔레콤 부회장)로부터 뜻밖에도 3.5인치 로켓 포에 대한 미군의 기술교범(TM)을 얻을 수
있어서 부품 및 조립도면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일이다.
다음은 시제를 맡길 전문업체를 찾아내 30일 안에 시제하도록 계약하는 일인데,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그간 산업실태를 조사한
자료와 상공부의 도움을 얻어 부품별로 시제 업체를 선정해서 가까스로 계약을 했지만, 그때 겪은 어려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날마다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는 청와대의 독촉이 빗발치듯 했고, 접촉한 업체들은 경험도 없는데다 기간도 너무 촉박해서 계약에
응하려고 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수없는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사업체의 기술진과 함께 밤새워 노력한 덕택에 12월14일 드디어 A1 및 B1형을 2문씩 조립하고
검사를 마쳤다. 비록 미 군사규격에 맞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사업기간 내에 시제에 성공한 것이다.
조립과 검사가 끝났을 때 연구원들은 긴장이 풀려서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국과연으로부터 시제품이 완성됐다는 보고를 받은 오수석은 12월15일 오후 국과연을 방문했다. 시제품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몇 가지 보완사항을 지시해 다시 밤을 새워 보완작업을 마쳤다.
예상치 못한 사격시험 지시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오수석으로부터 개발책임자들에게 시제품을 즉시 청와대로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현역 장교였던 우리는 머리는 장발인데다 수염도 텁수룩하고, 한달 이상 세탁을 못 한 작업복은 기름에 절어 모두들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었다.
오수석에게 전화해 난처한 사정을 말하고 이발하고 옷이라도 갈아입게 오후로 미룰 수 없느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오수석은 『지금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각하께 우리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는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정했으니 그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시제품들을 트럭에 싣고 청와대에 도착하니 오수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화기(小火器)와 로켓포는 접견실에 마련한 테이블 위에, 박격포는 테이블 옆 빨간 카펫 위에 진열한 후 개발 책임자들은 거지꼴을
하고 대통령을 맞기 위해 각자 시제품 앞에 도열했다. 밤새워 닦고 손질한 시제 병기들은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아 더욱 멋있어
보였다. 잠시 후 들어온 박대통령은 시제품을 잠시 응시하더니 미소를 띠며 신소장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박대통령은 이어서 도열한 개발 책임자들 앞으로 다가와 개발과정과 시제시 문제점들을 보고받은 후 시제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박대통령은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금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간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국과연으로 오수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제품으로 즉시 사격시험을 하라는 지시였다. 사격시험은
2차 시제품부터 할 것으로 믿고 있던 우리는 이 지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수석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격시험은 1971년도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미군 군사규격의 로켓 포열재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어 강도가 떨어지는
창틀용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시제했기 때문에 사격시 혹시나 폭압을 못 이겨 파열되지는 않을지, 파열된다면 인명 피해는 얼마나
클지 등등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전차 로켓탄은 위력이 큰 병기인데다 규격 재료를 쓰지 않은 시제포여서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안전 대책을 취해야 했다.
로켓포 주위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방호벽을 만들고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장치를 포에서 분리해 2m 길이의 전선으로 연결한 후
포와 사수 사이에도 모래가마니를 쌓았다. 참관인들은 로켓 발사시 뒤로 분사되는 후폭풍(後暴風)을 피해 로켓포 측방 50m 위치에
자리잡게 했다.
발사준비가 완료됐는데도 사격을 위해 차출된 병사가 겁을 먹고 쏘려고 하지 않아 첫 발은 개발 책임자인 내가 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눈을 감고 격발기를 당겼다. 순간 3.5인치 로켓탄은 『꽝』하는
굉음을 내고 날아가 표적에 명중했다. 이 순간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감사
기도가 나왔다. 연구원들과 같이 로켓포를 육안 검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제포 3문에 대한 사격을
연구원들이 차례로 실시했다. 명중률도 높았고 염려했던 포열도 이상이 없었다. 규격 재료만 사용하면 로켓포 국산화는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제2차 번개사업
제1차 번개사업 결과를 검토한 오수석은 제2차 번개사업 기간을 1972년 1월부터 3월 말까지 3개월로 정했다. 시제 품목은 1차 때와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수량이 훨씬 늘었다.
제2차 번개사업은 양산을 위한 마지막 시제 개발사업이기 때문에 군원품과 동일한 성능과 품질을 보장하려면 각종 도면, 품질검사서,
치공구 및 검사 게이지 등 기술자료 묶음을 갖춰야 한다. 3개월 내에 이를 갖추려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1972년에 들어서서 국과연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미 국방부가 1월7일을 기해 하딘 씨를 단장으로 하는
기술지원팀을 국과연에 파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초대 소장인 신응균 장군이 그간의 격무로 건강을 잃어 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2월1일부로 KIST 소장으로 있던 심문택 박사가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번개사업팀은 때맞춰 내한한 미국 기술지원팀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갈망하던 기술자료들을 적시에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병기에 대한
생산 도면도 「한국군 현대화 계획」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외군사판매(FMS)를 통해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연구원들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미 국방부가 국과연과 한국의 방위산업을 적극 지원한 배경은 번개사업을 통해 보여준 국과연 연구원들의 열성과, 도면도 없이
역설계로 병기를 제작해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시제하려는 병기 대부분이 미군에서는 이미 도태됐거나
머지 않아 도태될 구식 장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2차 번개사업이 성공하자 오수석은 3월 중순경 시제품에 대한 공개시사회 준비 지시를 내렸다. 시사회는 4월3일 보병 26사단
지역에서 박대통령을 비롯해 3부요인, 각군 총장, 방산업체 대표, 언론기관 및 연구기관장들의 참관하에 실시하게 돼 있었다.
국과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민간인 과학자로서 부임 두 달 만에 행사를 주관하게 된 심 소장은 누구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기전문가인 박 대통령에게
경과보고를 해야 하고, 시사회 후 박대통령이 시제품들을 둘러볼 때는 수행도 하게 됐으니 병기가 아직 생소한 심 소장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심 소장은 틈나는 대로 시제품 명칭과 제원을 암기했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개발
책임자들을 불러 확인하곤 했다.
4월3일 행사에 앞서 3월30일 유재흥 국방장관 임석하에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시사회 때의 해프닝
육군에서는 시사회를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 로켓포와 대전차 지뢰의 표적으로 못 쓰게 된 전차 2대를 준비했다. 폐전차 한 대는
로켓포 전방 150m에 있는 강둑에 설치했다. 국방장관을 모시고 한 예행연습 때 로켓탄 4발이 모두 전차에 명중했는 데도
관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어 행사일에는 관람효과를 높이기 위해 휘발유 2 를 비닐봉지에 담아 전차 포탑 안에
넣어뒀다.
4월3일 드디어 시사회 날이 밝았다. 날씨는 쾌청했고 사격장 인근 보리밭에는 소담스럽게 자란 보리들이 푸른색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삼부 요인, 각군 총장, 시제업체 대표 및 행사요원들이 대기한 가운데 박대통령이 헬기로 도착하자 국과연 소장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이어서 곧바로 시사회가 시작됐다. 맨 처음 카빈총을 시작으로 기관총, 40mm 유탄발사기, 3.5인치 및
66mm 로켓포, 크레모어 대인지뢰,
대전차 지뢰, 60mm 경량 및 표준형 박격포, 81mm 박격포의 순서로 시험이 실시됐고, 마지막에는 전 박격포의 일제 사격으로 끝을 맺었다. 시사회는 대성공이었다.
로켓포 사격에서는 3.5인치와 66mm 로켓탄 4발이 전부 전차 포탑에 명중했다. 그 순간 폭발음과 함께 전차에서 시뻘건 화염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안에 넣어둔 휘발유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효과 만점이었다. 박 대통령 이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대전차 지뢰시험 때에는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대전차 지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폐전차 밑에 지뢰를 매설했는데, 폐전차는
박대통령이 앉은 관람석에서 약 500m 거리에 있었다. 지뢰가 폭발하는 순간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흙먼지가 일어나 전차의 모습은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런데 공중에서 난데없이 『쉭-쉭-』 하는 파열음이 들리면서 몇 개의 물체가 관람석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모두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그 물체는 관람석 옆 개울에 떨어졌다. 전차의 무한궤도 조각이었다.
박 대통령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오수석의 얘기에 따르면 오수석 옆에 조그마한 쇳조각이 떨어져 무척 놀랐는데, 박대통령은 이런
소동에도 아랑곳않고 쌍안경으로 전차의 피해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 전차를 보니 전차 포신이 떨어져
나간 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행사를 주관한 심 소장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심소장에게 『예정대로 진행시키라』 하여 계획된 시험을 모두 마쳤다.
다음 시험은 맨땅에 매설한 대전차 지뢰 3발을 0.5초 간격으로 연속 폭발시키는 시험이었다. 대전차 지뢰가 폭발한 자리에는 지름
2m, 깊이 1m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대전차 지뢰는 무게 40~50t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정말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 경호실에서는 지뢰개발 책임자인 김직현 박사(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심문했다. 원인은 혹시 지뢰가 안 터지면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지뢰를 하나 더 묻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뢰가 둘 다 폭발하는 바람에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탄약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두 개가 다 폭발했을 경우의 안전거리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훗날 김 박사는 그 순간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시사회가 끝난 후, 박 대통령은 감개무량한 듯 사격장을 한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게 만족한 모습이었다. 박대통령은 심 소장의
안내에 따라 전시된 국산병기들을 둘러보았다. 연구원들은 모두 조마조마했지만 대통령의 질문에 심 소장은 능숙하게 답변했다.
그 후 「개발생산」으로 명명된 제3차 번개사업이 4월1일부터 6월 말까지 이어졌다. 개발 생산 사업은 이미 개발한 병기를 생산함과 아울러 통신기, 탄약 및 개인 장구류를 추가 시제 개발하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극비명령
1971년 12월24일 제1차 번개사업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날 오랜만에 귀가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과 이발소를 찾았다. 번개사업이 시작된 지 한달 반밖에 안 됐는데 마치 수개월이 지난 것 같았다.
월요일 일찍 출근해 2차 번개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있는데, 오수석으로부터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때는
대개 비서관을 통해서 연락했는데 그 날은 오수석이 직접 전화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수석 사무실로 들어가니 공군 작전참모부장인
김중보(金重寶) 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오수석의 표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다. 오수석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각하의 명령을 하달한다. 극비사항이다. 보고 난 후 즉시 파기하라. 오늘 당신들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사전 준비를 위한 것으로 정식 명령은 국방부를 통해 하달될 것이다. 국과연은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즉시 개발계획을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하고, 공군은 유도탄이 개발된 후 작전운영계획을 수립해서 대통령께 보고할 것. 이상』
오수석이 내민 것은 놀랍게도 박대통령의 친필 메모였고, 메모지 서두에는 빨간 잉크로 「極秘」라고 씌어 있었다. 그 내용이 하도 엄청난 것이라 나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메모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도탄 개발지시
극비
⊙ 방침
(1) 독자적 개발체제를 확립함.
(2)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1단계는 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함.
(3) 기술개발을 위하여 국내외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외국 전문가도 초청하며 외국과도 기술 제휴함.
⊙추진계획
(1) 비교적 용이한 것부터 착수한다.
유도탄 사거리 : 200km 내외의 근거리
(비행거리가 멀면 투자비가 고가, 기술의 고도화를 요하게 됨).
탄두 : 전략표적 파괴목적으로 파괴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을 유지함.
(2) 유도탄 기술연구반을 ADD(국과연)에 부설하고 공군에 유도탄 전술반을 설치함.
이상.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이 3.5인치 로켓탄도 못 만들어 쩔쩔매던 판국에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그것도 4년 안에
개발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기술수준이 어떤지 대통령이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대통령이 적극 도와준다고 해도 의욕만 갖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수석의 숨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번개사업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은 지나치다고 느꼈다. 오수석은 공군에 지대지 유도탄을 작전 운영토록 한 것은 공군이 우리 군의
전략타격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76년까지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하라』
나는 오수석에게 『대통령 명령이시니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미국처럼 모든 노하우와 연구시설이 갖춰진 나라에서도
퍼싱(Pershing, 사거리 600km)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것을 생각하면 이 명령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과연에는 엄연히 소장, 부소장이 계신데 나 같은 일개 실장을 불러 이런 중대한 지시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오수석은 『보안 이유도 있지만, 로켓 연구실장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방부에서 정식 공문이 하달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지대지 유도탄 개발계획을 구상하고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말했다.
71년 1월28일 박대통령의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유도탄과 같은 정밀병기 개발은 1980년 초까지 기술기반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국과연의 장기연구개발계획에는 유도탄, 그것도 단거리 전술 유도탄 개발을 1970년대 후반부터 착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그런 엄청난 지시를 받고 보니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국방부(합참)에서 정식으로 하달된 유도탄 개발지시 내용은 한 술 더 뜬 것이었다. 국방부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정식 공문은 1972년 4월14일 국과연에 시달됐는데 보안을 위해 「항공공업 육성계획 수립지시」라는 위장 사업명으로 돼
있었다. 메모지 내용과 다른 점은 『북한의 기동공격무기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단거리 전술 지대지 유도탄을 1974년
말까지 개발 및 생산하고, 1976년까지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를 단시간 내에 파괴 및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국과연 소장 책임하에 거국적으로 연구계획단을 편성해 8월 말까지 구체적인 연구개발계획서를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탄두 개발과 더불어 급속도로 발전해온 유도탄은 그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개량되고 있었다. 유도무기는 이제
무기체계에 핵심이 됐을 뿐 아니라 현대전을 과학기술전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또한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은 적 후방
깊숙이 위치한 전쟁지휘본부 등 전략 표적을 강타할 수 있어 전쟁을 억지하는 주요 무기체계가 됐다.
당시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공격양상은 1967년 중동의 6일 전쟁이나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처럼 우세한 전폭기, 기계화 부대, 유도탄 및 고속정을 총동원한 기습에 의한 단기 속도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와 같은 군사적 위협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억지력을 가진 정밀 전술 및 전략
타격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시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지대지 유도탄을 단 한 발도 갖고 있지 못했고, 무유도 로켓탄인 어니스트 존(Honest John) 1개
대대가 배치돼 있을 뿐이었다. 미국이 한국군에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과 같은 1급 공격무기를 제공할 리 만무한 상황에 북한의
끊임없는 군사적 도발로부터 국가를 보위할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의 긴박한 심정을 당시에는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정책의
무모함만을 탓했다.
유도탄 개발계획 수립
국방부 지시에 따라 국과연 소장은 5월1일자로 국과연, KIST, 한국과학원,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구성된
개발계획단을 설치하고 기본 사업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계획단 요원은 KIST에서 이경서·정선호·손성재·김연덕, 한국과학원에서
김길창·윤덕룡, 육군에서 김정덕, 해군에서 최호현, 공군에서 홍재학, 국과연에서 박귀용·서정욱 박사 들과 필자였는데, 당시 활용
가능한 인원은 모두 동원됐다. 박귀용씨는 공군에서 전역한 후 제2차 번개사업중에 국과연에 입소했다. 계획단장은 심소장이 직접
맡고 간사는 이경서 박사가 맡았다. 여기서 1970년 초 우리나라의 로켓 개발 현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1970년 국과연이 창설되고 내가 로켓 분야를 맡았을 때 우리나라에는 국과연 외에 로켓을 연구하는 두 그룹이 있었다. 공사
교관들로 구성된 연구팀과 KIST의 특수사업팀이 그들이었다. 공사 로켓팀은 박귀용 중령이 주축이 돼 과학기술처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공군의 2.75인치 공대지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열의는 대단했으나 불충분한 연구비, 연구시설 미비와 국내
산업의 기술낙후로 많은 애로를 겪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로켓 추진제 제조가 가장 문제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추진제
제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복기추진제 대신 아스팔트형 추진제를 실험실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로켓을 발사하기 전에 로켓 추진기관(rocket motor)의 추진력을 시험하는 지상 연소시험을
통하여 로켓의 비행성능을 예측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개발단계를 밟았다. 마침내 1971년 10월25일 인천 팔미도에서
발사시험에 성공했는데 비행상태를 계측할 장비가 없어 정확한 탄도를 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나는 지상 연소시험과 비행시험에
모두 참관했는데 나중에 로켓을 연구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KIST에서는 이경서 박사(현 단암전자 사장)가 중심이 되어 대전차 유도탄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단계여서 실질적인 연구활동은
없었다. 1971년 2월16일 로켓 연구의 통합을 위해 과기처 주관으로 KIST 회의실에서 국과연, 공사 및 KIST의 관련
연구원들이 모여 회의를 했으나 결론 없이 헤어졌다. 이런 가운데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공사와
KIST의 로켓 연구팀이 모두 국과연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계획단은 구성됐지만 구성원의 소속이 다르고 작업내용 또한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쳤다. 국방장관은 이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계획단 자문위원으로 국군보안사령관과 합참 정보국장을 지명했다. 일례로
비밀작업을 수행하려면 단원들에게 군사비밀 취급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국과연 직원과 현역 군인들 외에는 비밀취급 인가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KIST의 일부 박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다 온 유치 과학자들로, 주민등록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민등록이 된 사람도 비밀취급 인가를 위한 신원조회에 통상 한 달 이상이 필요한데 주민등록도 없는 사람을 신원
조회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작업기간은 4개월도 안 남았는데 비밀취급 인가를 받는데 1개월 이상
허비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민간인들은 과거에 비밀 업무를 취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보안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안가에서 비밀작업
설상가상으로 대미(對美) 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 기술지원단이 있는 국과연에서의 작업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군사기술정책이 105mm 곡사포조차도 「절대 불가」였음을 생각할 때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한다고 하면 미국은 틀림없이 이를 무산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이경서 박사와 같이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를 방문해 강창성 사령관에게 박대통령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지시와 계획단의 편성
및 작업계획일정을 브리핑한 후 계획단원의 신속한 비밀취급인가 취득 보안교육 비밀작업장소 확보에 대한 조치를 건의했다. 이에
대해 강사령관은 『그렇지 않아도 각하로부터 「항공공업」을 최대한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건의사항은 최단시일 내에 처리하겠다.
이 업무를 전담할 장교를 국과연에 파견하겠으며 앞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파견관의 도움을 받거나 나한테 전화하도록 하라』며 흔쾌히
건의사항을 받아들였다.
강 사령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한 달 이상 걸리는 비밀취급 인가가 일주일 만에 나왔고 곧이어 계획단원 전원이 보안학교에서 이틀간
군사보안 교육을 받았다. 현역 군인들에게는 익숙한 내용들이었지만 민간인들은 난생 처음 듣는 보안규정에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보안사에서는 또 작업장소로 모처에 안가를 마련해 주었는데, 상근 작업요원은 계획단원 중에서 학교수업 등 사정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핵심 인원만으로 편성했다.
4개월간 안가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작업한 상근 요원들은 김정덕(현 하나로 통신 부사장), 박귀용, 이경서, 최호현, 홍재학
박사(현 단국대 교수)와 필자였다. 그 외에 과학원의 윤덕룡 교수와 김길창 교수, 그리고 KIST의 김연덕 부장은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해 자기 분야에 대해 작성한 계획서를 놓고 토론했다.
본격적인 항공공업계획 작업은 1972년 5월8일 저녁부터 시작됐다. 심 소장은 업무개시 전날인 5월7일(일요일) 저녁에 상근요원 부부를 초청해 최고급 요리로 대접하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의 남편들은 국가의 중요한 일로 확실한 기간은 예상할 수 없지만 내일부터 상당 기간 해외출장을 떠나야 하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앞으로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아 달라』
보안문제를 걱정한 소장이 연극을 한 것이었지만, 심 소장의 연기가 어찌나 천연덕스러웠는지 속지 않은 부인이 없었고, 다들 기가 질려 말을 못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옷보따리를 쌌다. 보안상 이유로 밤에 안가로 이동했다. 안가라고 해서 무슨 별난 곳인 줄 알았는데 일반 주거지
안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안가에는 보안사에서 파견된 상사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사로부터 주의사항이 내려졌다.
24시간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놓을 것, 최대한 정숙을 지킬 것, 낮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바깥 출입을 금할 것, 식사는 집
안에서 할 것, 전화는 업무에 국한하되 지정된 자만 할 것 등이었다.
보안사의 준비도 철저했지만 주의사항도 많아 처음부터 무척 긴장이 됐다. 심 소장은 연구소와의 업무연락은 보안상 국과연 소속인 내가 하도록 지시했다. 안가의 전화번호도 국과연에서는 심소장만 알고 있었다.
작업 일정을 정하고 각자가 맡을 업무를 분담했다. 이경서 박사가 총괄, 박귀용씨는 추진기관, 기체는 홍재학 박사, 유도조종은
최호현 박사, 시험평가는 필자가 맡았다. 원래는 내가 유도조종 분야를 맡도록 돼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시험평가에 대해 생소한
데 비해 그나마 나는 번개사업 경험이 있었고 유도탄 체계문제와도 관련되니 내가 맡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외에 김길창 박사가
연구개발 PERT를, 윤덕룡 박사가 재료, 김정덕씨가 공작을 맡았다.
가장 급한 것은 지대지 유도탄의 개념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즉 유도방식, 기체 형상, 추진기관 및 추진제 등에 대한 개념을
정하는 일이었다. 이런 것들을 정해야만 이에 필요한 연구인력, 장비 및 시설을 결정하고, 각종 지상시험과 비행시험을 어떻게 하고
이에 필요한 계측장비를 어느 규모로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유도탄의 원리에 대한 기본 자료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지대지 유도탄에 대한 자료는 외국에서도 대부분 비밀에
속하기 때문에 있을 리가 없었다. 구체적인 자료들을 확보하지 못해 개발계획을 정확하게 작성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개발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1차 번개사업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지만, 이번 유도탄 개발사업은 번개사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의 일이었다. 필요로
하는 자료들은 거의가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 외국에서, 그것도 1, 2개월 내에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본병기에 관한
것이면 미 기술지원단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유도탄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합참 정보국장에게 부탁했지만 해외주재 무관들이 유도탄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단기간에 그런 자료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 와중에도 미국과 유럽에 주재하는 무관들이 그곳 잡지와 일간지에 난 유도탄 관련 기사를 보내줬는데,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 성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보다. 이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 국방부로부터 예상치 않은 군 연구소 방문초청장이 하딘씨를 통해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미 국방부 초청장
안가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심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 기술지원단 단장인 하딘씨와 함께 할 얘기가 있으니 소장실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한국 방위산업의 역사가 일천해서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규정 및 순기(循期) 관리절차가 정립돼 있지 않아
미국이 기술 지원하는 데 지장이 많다. 앞으로 국과연이 독자적으로 무기를 개발할 경우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는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도 중요하지만 국과연에 연구개발에 대한 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과연 연구원들과 연구개발 업무를 협조하는 데에도 용어의 정의와 개념이 달라 어려움이 많다. 우리가 국과연 연구원들에게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절차와 용어를 교육하는 문제도 고려해봤으나 그보다는 연구원 한 사람을 미 국방부 및 육·해·공군 연구소를
견학시켜 국과연 직원에게 전수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구 박사를 미 국방부에 추천했는데, 어제 초청장과 여행 일정이
왔다.
항공료와 숙식비 등 모든 경비는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
하딘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초청 관련 서류와 비행기표를 내놓았다.
지금 들으면 어처구니없는 얘기이지만, 당시 국과연 연구원과 하딘팀 사이에는 용어상의 혼선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미군은
연구개발과정을 단계별로 기초연구, 응용연구, 탐색개발, 선행개발(A 및 B) 등으로 나누어 연구 내용과 성격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데 반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위한 기초연구만 하고 귀국한 국과연 연구원들은 이러한 구분을 알 턱이 없어 개발 및
검토사항까지도 전부 연구라고 말하니 미국측으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하딘팀은 주요 무기체계를 새로 개발하려면 개념 형성, 타당성 검증, 실용개발 및 생산단계와 이에 따른 시험평가를 거쳐야
하는데 무조건 미국의 기술자료에 의존하려고 하니 앞으로 국과연의 독자적 연구능력 배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무기의
품질보증을 위한 시험평가를 소홀히 하는 데에 우려를 나타냈다.
나의 방미 일정은 5월16일부터 6월28일까지 44일간에 걸쳐 육·해·공군의 연구개발을 관리하는 사령부와 산하의 화포, 탄약,
신관, 유도탄 등의 연구소뿐만 아니라 휴즈(Hughes) 및 필코-포드(Philco-Ford) 등 방산업체도 방문하도록 짜여
있었다. 방위산업 전반을 이해할 수 있게끔 작성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밤 상근 계획팀은 안가에서 심소장과 모임을 갖고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하고 연구소마다 2∼3일로 돼
있는 대부분의 방문 일정을 대폭 조정, 유도탄연구소에서 가급적 오래 머물도록 수정했다. 즉 전체 방문일정의 반인 3주를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체재하도록 했다.
다음날 하딘씨를 만나 로켓과 유도탄 연구를 책임진 나로서는 유도탄연구소 위주로 방문일정을 바꾸고 싶다는 말과 함께 수정된 일정을
제시했다. 하딘은 난색을 표하면서 『구박사, 넘버 원 말썽꾼!(Dr. Ku, you, No. 1
trouble-maker!)』이라고 소리쳤으나 결국은 나의 간청에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2주일간 머무는 것으로 일정을
수정해줬다. 그 후부터 하딘팀에서는 툭 하면 나를 『넘버 원 말썽꾼』이라고 불렀다.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72년 5월16일 오후 2시15분 나는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미국의 NWA 006기에 몸을 실었다. 출장 일정은 워싱턴에서부터
시작됐다. 미 국방당국은 내가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칠 때까지 안내장교를 붙여줘 여행에 불편함이 전혀 없도록 배려해줬다.
방문기관마다 오전 9시부터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후 4시까지 브리핑이 계획돼 있어 날마다 6시간씩 브리핑을 들었다.
도저히 전부 소화할 수 없어 양해를 구하고 녹음을 했다.
5월21일, 육군 유도탄연구소가 있는 앨라배마주의 헌츠빌에 도착하였다. 육군 유도탄연구소는 육군 유도탄사령부(MICOM) 산하
연구기관이다. MICOM (Army Missile Command)은 전에 레드스톤 조병창(Redstone Arsenal)으로
불리던 곳으로 그 면적은 3000만 평이 넘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폰 브라운 박사가 이곳에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했고 지금도 NASA의 주요 연구시설이 이곳에 있다. 말하자면 미국 우주개발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도시의
자랑인 우주박물관에는 미국이 개발한 각종 로켓과 우주선이 실물로 전시돼 있는데 아폴로 로켓은 너무 커서 눕혀서 전시해 놓았다.
5월22일 아침 유도탄 연구소에 도착하니 체계연구실장인 웜불씨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안검사가 퍽이나 까다로웠다.
웜불씨는 나를 곧바로 소장실로 안내했다. 소장인 맥다니엘 박사는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한 유도탄 전문가였다. 나는 준비해간
브리핑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군사정세, 국과연의 설립 배경, 임무와 기능을 간단히 언급하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로켓 개발
현황과 앞으로의 연구개발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2주간 머무는 동안 한국에 유도탄 연구소를 세우는 데
필요한 연구 및 시험장비 등의 내역, 제작회사 및 예상가격 추진제, 유도조종장치 및 기체 등을 시제하는 데 필요한 원료,
부품의 공급회사 및 단가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조직 등에 관한 모든 자료를 지원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부탁이어서 맥다니엘 소장의 반응이 어떨지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소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 겪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오른다면서 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가슴 졸이던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감사기도가 나왔다.
맥다니엘 소장은 곧바로 각 연구부장들을 소장실로 집합시켰다. 체계연구실장, 추진기관부장, 비행탄도(기체)부장, 유도조종부장,
지상장비부장, 시험평가부장 및 기술지원(공작)부장이 모이자 나를 소개한 후 『각 부장들은 구박사가 연구실을 방문할 때 연구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며 2주 안에 필요한 자료들을 최대한 준비할 것과 체계연구실장이 이를 종합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웜불씨는 후에 국과연과 유도탄 연구소가 유도탄에 관한 기술자료협정 부록을 체결할 때 미측 실무책임자가 돼
국과연의 유도탄 기술지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물로 받은 관성항법장치
정신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하나라도 더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묻는 동안 2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6월2일 모든
일정을 마친 나는 장교클럽에서 소장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장에는 소장 외에 각 연구부장들이 참석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맥다니엘 소장이 일어나서 『구박사의 방문이 국과연의 유도탄연구실 건설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후
내게 세 가지 선물을 내놓았다. 하나는 소장 지시로 각 부장들이 준비한 각종 자료, 또 하나는 이 곳 유도탄 연구소에서
차세대용으로 개발하고 있는 헬기 발사 대전차 유도탄의 개발 및 시험과정을 찍은 16mm 컬러필름이었다. 연구소에서 붙인 이
유도탄의 명칭은 호넷(Hornet)이었지만 미 육군에서 정식 무기로 제식된 후에 헬파이어(Hellfire)로 개칭됐다. 헬파이어
유도탄은 걸프전에서 이라크 전차를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마지막 하나는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다름아닌 관성항법장치였다. 비록 유도탄용이 아닌 무인 항공기용이었지만 유도탄용
관성유도장치와 원리상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유도조종부 방문시 부장에게 관성유도장치에 대한
모형이라도 있으면 구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소장에게 얘기한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에 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선물로 받은 자료철을 열어보니 무려 800쪽이 넘는 유도탄 관련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유도탄 연구개발에 관한
연구 및 시험장비의 카탈로그와 어니스트 존(Honest John) 크기의 유도탄을 개발할 때 필요한 유도탄 연구실 조직표 및
예상 인력자료까지 첨부돼 있었다. 이 정도면 항공공업계획을 어느 정도 수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4일간에 걸친 나의 방미는 우리의 유도탄 개발계획에 하나의 전기가 됐다. 이를 통해 국과연 연구진은 비로소 구체적인 계발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실패, 또 실패…날아라 백곰, 제발 날아라
「백곰」유도탄인 km 떨어진 목표 상공에 도달해 표적을 향해 수직낙하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유도탄이 표적지 해면에
낙하하면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의 중계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에 나타났다. 시험책임통제원의 『탄착!』목소리와 함께 대통령 이하
단상의 모든 참관인은 환호성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지난 몇 년 동안 오로지 이 날의 성공만을 기원해 온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1978년 9월 26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유도탄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이었다.
필 자가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구해온 자료는 「항공공업계획」(유도탄 개발계획의 위장 명칭) 수립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여름이 다가오면서 우리 팀이 작업하던 안가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보안 때문에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고 선풍기 하나로 견뎌야 했으니 그런 고역이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마다 온몸에 돋은 땀띠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항공공업계획」은 이를 뒷받침할 책자 『항공공업육성방안』을 만드느라 예정보다 보름 지난 1972년 9월15일에 완성됐다.
『항공공업육성방안』은 지대지 유도탄 개발에 관한 총론, 기체 및 구조, 유도조종, 시험평가, 재료 및 공작 등 각론으로
구성됐는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됐다.
「항공공업계획」 『항공공업육성방안』을 청와대 보고용으로 요약한 것이 「항공공업계획」이다. 그 내용은 지대지 유도탄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국내 기술수준을 비교 검토하고 이에 필요한 연구 시험장비, 시설, 인력 및 소요 예산을 제시한 뒤 관련 기술
및 산업기반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추진제 공장, 풍동, 대형 컴퓨터 등 연구개발장비와 비행시험장비를 구입하고 제반시설을 갖추는
데에만 미국의 견제가 없다고 해도 최소 2년은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반시설을 확보한 후에도 관성유도조종장치를 갖춘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에는 외국의 기술지원이 없는 한 5~7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1976년까지 유도탄 개발은 극히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원철(吳源哲) 청와대 제2 경제수석을 통해서
이 내용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자 『이른 시일 안에 유도탄을 개발할 연구소와 시험장 건설을 포함한 세부계획을 작성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와 이경서 박사(현 단암전자 사장)는 그후 1년 반에 걸쳐 유도탄 연구소와 비행시험장 후보지를 물색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당시는 국도도 제대로 포장돼 있지 않아 어려움이 컸다. 경남 해안을 답사할 때에는 도로가 없어서 해군의 상륙 주정(舟艇)을
빌리기도 했다. 결국 대덕지역이 연구소 후보지로 결정됐고, 비행시험장은 유도탄의 수송 및 안전문제 등을 고려해 서해안
안흥지역으로 확정됐다.
연구소와 시험장의 부지면적은 시험 안전성 문제 때문에 애초에 100만평을 요청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소 중에서
10만평을 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유도탄 연구개발과 생산시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거리 수백km의 유도탄 개발에 필요한 추진제 및 탄두 제조시설, 대형 추진기관의
지상연소시험시
안전거리 확보의 불가피성, 미국과 유럽의 유도탄연구소 대지면적 등을 제시해서 대덕 유도탄연구소는 90만평, 안흥 시험장은 바다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조건으로 30만평을 일차 확보할 수 있게 됐다.
1974년 5월14일, 「항공공업계획」은 마침내 박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율곡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기본지침의 핵심 내용은
사거리 500km의 지대지 유도탄(미 육군의 퍼싱급)을 1978년까지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과연은 항공사업담당
부소장 산하에 추진기관, 기체, 유도조종, 시험평가 등 6개 부서로 구성된 기구를 설치하고 유도탄 개발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전기계창」으로 위장한 유도탄연구소는 1974년 9월부터, 「안흥측후소」로 위장한 비행시험장은 1975년 1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반대를 극복하고 1973년 이후 국과연은 유도탄 개발사업을 위해서 국내외에서 많은 고급두뇌를 유치하고 있었지만 그 중
유도탄 개발 경험을 가진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유도탄을 시제할 방산업체 또한 전무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사거리 500km의 퍼싱(Pershing)급 유도탄을 1978년까지 개발한다는 것은 미국의 지원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기술지원정책은 철저하게 기존 보유무기와 방어무기에 국한돼 있었고, 장거리 유도탄에 대한 기술지원은 말도
꺼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항공공업」 사업팀은 우선 사업을 3단계로 설정해 지대지 유도탄체계를 선정했다. 제1단계는 기존 무기체계의 모방개발 단계로
지대지 유도탄의 체계설계 및 제작능력을 키우고, 제2단계에서는 모방개발한 무기체계에 대한 성능개량을 시도해서 이를
무기체계화하며, 제3단계에서는 퍼싱급에 준하는 한국형 지대지 유도탄을 독자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제1단계 사업으로 선정된 유도탄이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NH) 유도탄이었다.
NH 유도탄은 50년대에 미국의 맥도널 더글러스사(MD)가 지대공(地對空) 목적으로 개발한 유도탄으로 부차적으로 지대지(地對地)
기능도 갖추고 있다. 작년 말 오발사고가 나기도 했던 NH 유도탄은 레이더로 유도되는(레이더 지령유도방식) 2단추진 방식으로
지대지의 경우 사거리는 180km, 탄두 중량은 약 500kg이다. 우리 육군에도 60년대 중반에 도입돼 운영되다가 70년대는
지대지 임무로도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NH 유도탄은 50년대 기술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모방개발을 하더라도 대폭적인 성능개량이 필요했다. 우선 사거리를
연장하기 위해 1, 2단 추진기관을 전부 추진력이 큰 복합추진제로 바꾸고, 전자회로를 모두 반도체화하며, 유도신호처리도
컴퓨터화하기로 했다.
또 1단계 사업을 조기에 완수하기 위해 NH 유도탄의 제조회사인 MD사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경서 박사가
MD사와 교섭을 하게 됐고,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는다는 전제로 예비 설계에 대한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기간은 6개월로
정하고 우리 연구팀이 연구에 참여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 예상대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주한미군 사령관(스틸웰 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미
국방부의 안보 담당차관보(아브라모비츠)까지 국과연을 방문해 강력하게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오원철 수석은 미국이 박대통령에게
가한 유도탄 개발 중단 압력도 대단했다고 말한다.
미국측이 제시한 반대 논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사거리 100km가 넘는 유도탄의 경우 공산오차가 통상 100m 이상이기 때문에
고폭탄에 비해 수천 또는 수만배의 위력을 갖는 핵이나 화학탄두를 장착하지 않는 한 비용·효과면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장거리 유도탄 개발은 곧 핵탄두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핵확산 방지 차원에서 반드시 중지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한국이 요청한 기술 및 장비의 판매를 모조리 거부했다.
국방부와 국과연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미국을 설득했다. 『한국의 유도탄 개발은 한국군이 보유한 NH 유도탄의 성능개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 육군이 머지않아 NH 유도탄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공 유도탄인 패트리어트(Patriot)로 대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번 한국의 유도탄 개발은 향후 한국군의 NH 유도탄 정비 유지와 성능개량을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박대통령의 강력한 의지표명도 있었다.
한·미 양국정부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끝에 결국 미국 정부는 『현재 한국군이 보유한 NH 유도탄의 사거리 180km와 탄두중량
1000파운드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해한다』는 의견을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스틸웰 대장 명의로 국과연에 보내왔다.
이에 따라 1975년 12월 국과연과 MD사 간에 1단계 계약이 이뤄졌고, 국과연 연구원 10명이 6개월간 MD사에 파견돼 NH
유도탄의 지대지 성능개량을 위한 기술습득과 기술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미국정부가 스틸웰 대장을 통해 국과연에 서한 형식으로 통보한 유도탄 사거리 및 탄두중량 제한에 관한 사항은 5공정부 때에 양국간
외교문서로 공식화됐는데, 문민정부 출범 후 북한의 장거리 유도탄 개발이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 우리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서 규제한 사거리보다 훨씬 불리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MTCR는 유도탄 기술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국주도하에 만든 규약으로 G7 국가를 비롯한 회원국은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을 초과하는 유도탄 기술을 제3국에 일절 제공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도탄 사거리가
180km로 제한돼 있는 실정이다.
시험평가업무를 맡고 유도탄사업이 본격 시작되면서 필자는 유도탄의 지상 및 비행시험을 위한 기법개발과 시험장 건설업무를 맡게
됐는데, 시험평가부를 지상연소시험실, 비행시험실 및 계측장비실로 편성하고 국내외에서 연구원들을 유치했다. 미국의 김동원 박사(현
양재시스템 상임고문), KIST의 정기원 박사(현 숭실대학교 교수)와 강정수 박사 등이 이때 시험평가부에 합류했다.
지상연소시험이란 유도탄 비행시험(발사시험)을 하기 전에 지상에서 추진기관을 연소시켜 성능과 신뢰도 등이 설계한 값과 오차가
없는지 확인하는 시험이다. 마치 항공기를 개발할 때 탑재할 엔진을 지상에서 충분히 시험한 후 비행시험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추진기관을 비롯해 다른 부품들의 성능과 신뢰도가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비행시험을 하게 된다.
유도탄은 항공기와는 달리 일단 발사하면 회수해서 다시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시험에 수십억원의 돈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유도탄 비행시험에는 레이더, 광학추적장치, 내부 원격측정장치 등 수많은 계측장비들을 총동원해 비행중인 유도탄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행기록을 분석해야 한다.
지난번 미국출장을 통해 시험장비를 파악했지만 막상 극비리에 시험장을 설계하고 건물 사양과 계측장비 배치도를 만들려니 시간도
쫓기는 데다 전문가도 없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상연소시험장은 대덕 유도탄연구소에 건설하기로 결정됐지만, 비행시험장은
시험장 건설 외에도 최소한 사거리 200km, 폭 30km 이상의 방대한 안전지역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까지 있어 공역(空域) 및
해역(海域) 사용을 위해서 정부부처들과 합의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1978년까지 유도탄 개발을 마치려면 지상연소시험장은 늦어도 1975년까지, 비행시험장은 1977년까지 완성돼야 했다. 그런데 건설에 필요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니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또 한 차례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 심소장이 1973년 미국출장중 미 국방차관을 만나 한미 국방과학기술협력의
일환으로 제안한 「과학기술자교류(SEEP)」가 합의돼 1974년 1월 내가 SEEP 1호로 6개월간 미 육군유도탄 연구소로
시험평가 연수를 떠나게 된 것이다.
1년 반 만에 다시 헌츠빌의 육군 유도탄연구소를 찾은 나는 소장 이하 간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측에서는 내가 최소한 1년은 체재해야 한다고 했지만 시급한 일정 때문에 6개월로 결정됐다. 6개월 연수기간을 지상연소시험장과
비행시험장 각 2개월, 환경시험장과 자료처리실 각 1개월로 나눠 정했다. 유도탄 비행시험은 뉴멕시코주의 화이트샌드(White
Sand) 시험장에서 하기 때문에 그 곳을 방문하는 일정도 15일 포함됐다.
나는 II급 이상의 비밀이 아닌 모든 시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시험보고서도 볼 수가 있었다. 연수기간에 시험기법과 자료처리
프로그램, 시험절차 및 시험장 관리규정 등을 입수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소득은 각 시험장의 주요 건물도면을 얻은 것이었다.
또 이번 연수를 통해서 시험장에는 폭발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위험구역과 안전구역을 분리하는 것이 기본철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1974년 7월 유도탄 시험평가에 필요한 연수를 마친 후 귀국길에 오른 나는 시험장 건설에 한결 자신을 갖게 됐다.
박대통령의 불시 방문
1974년 9월부터 대덕 유도탄연구소 건설공사는 착수됐지만 추진제 제조 및 각종 시험에 필요한 전용장비의 구입이 큰 문제였다.
미국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는 장비들이 많았는데 한국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미국정부의 거부감이 너무 완강해 미국에서 도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도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것은 추진제 제조의 핵심장비인 연료와 산화제를 고르게 섞는 대형 혼합기(Mixer)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00갤런 용량의 혼합기였는데 당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도 50갤런 이상의 혼합기는 미국에서 구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혼합기 확보문제로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경서 박사가 한 재미동포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미 공군에 추진기관을
납품하는 록히드 추진제회사(LPC)가 불황 때문에 공장을 폐쇄하면서 시설 일체를 처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LPC사와
접촉한 결과 260만 달러에 계약이 이뤄졌다.
주요 장비는 300갤런 혼합기 2대를 비롯한 추진제 제조 및 지상연소시험장비 일체와 대형추진기관의 비파괴시험을 위한 2000만
eV(전자볼트)의 X선을 만들 수 있는 베타트론(Betatron) 등이었다. 그 외에 추진제와 관련된 기술서적과 각종 군사규격서
등 귀중한 기술자료들이 포함돼 있었다. 말 그대로 「완전 떨이」였다. 만일 이것들을 새로 구입했다면 수천만 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시험장비 일체를 쉽게 확보하게 돼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입수한 건물 도면과 시험장비 구성도를 바탕으로 지상연소시험장 설계도를
완성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상연소시험은 유도탄 추진기관의 성능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을 가장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형추진기관은 추진제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만일 폭발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따라서 추진기관을
연소시키는 시험대와 연소시험을 통제하고 시험자료를 계측하는 통제소 건물은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정전기(靜電氣) 대책도
세워야 한다.
미 육군유도탄 연구소의 경우 시험대와 통제소간 거리가 300m가 넘는 데도 시험대에 면한 통제소 벽은 30cm 이상의 철근
콘크리트로 돼 있다. 당시 우리 건설업체들은 아파트나 일반 사무실 외에는 지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지상연소시험대와 통제소
건물의 특수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잘 납득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국과연 설계팀을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로 견학시키기도 했다.
1976년 9월, 통제소와 시험대가 완공되고 LPC에서 도입한 장비를 설치해 마침내 지상연소시험장의 준공을 보게 됐다.
시험장 준공 후 프랑스에서 습득한 추진제 기술을 활용해 시험용 추진기관(MIMOSA)을 시제, 지상연소시험을 실시했다. 모든
장비가 차질없이 작동됐다. 컴퓨터로 통제되고 시험 후 그 결과를 즉시 알 수 있는 첨단시설을 갖춘 이 시험장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지상연소시험장 건설이 한창일 때 박대통령의 불시 방문을 받았다. 당시 나는 지상연소시험장의 조기 완공을 위해 추진기관팀과 함께
대전에 미리 내려가 있었다. 박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한 후 경호원 1명을 데리고 불시에 건설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소장과 부소장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선임자인 내가 부득불 대통령을 안내하게 됐다. 박대통령이 추진제 공장을 비롯해 본관
및 지상연소시험장 등을 다 돌아보자 마침 점심시간이 됐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일어났다. 건설 현장을 둘러본 박대통령이
이 곳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는 건설요원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식당(일본말로 「함바」)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전기계창은 보안상 민가와 격리된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반 식당도 10km나
떨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칸을 막아 급조한 간부식당으로 대통령을 모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박대통령을 알아본 건설요원들과 식당 아주머니들은
놀라서 얼어붙다시피 했는데, 박대통령이 식당 아주머니에게 『밥 한그릇 부탁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가져오세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식사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통령은 콩나물국, 된장찌개, 나물과 김치뿐인 반찬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숭늉까지 한 대접 다 드셨다. 나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해서 식탁에 앉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지금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대통령은 인상이 근엄하고 과묵해서
대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과학자들에게는 늘 자상하고 농담까지 하는 분이었다.
유도탄 비행시험장 건설
한편 유도탄 비행시험장은 1974년 12월 태안반도에 있는 안흥지역으로 확정됐다. 안흥과 이에 면한 해상이 비행시험장으로 결정된
이유는 유도탄 발사시험에 필요한 180 29km의 광활한 안전구역을 내륙에서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사격구역을 영해로
한정할 수 있어 국제법상 문제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안문제도 아울러 해결할 수 있으며, 비행시험시 탄착지점 확인과 각종
비행자료를 수신하기 위한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시설을 해군기지 안에 설치할 수 있어 시설보안을 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4년 9월 지도상에서 안흥지역을 시험장 후보지로 결정한 후 현지답사를 위해 지프로 서울을 출발했다. 보안상 운전기사를
대동할 수도 없었다. 당시는 국도도 대부분 포장이 되지 않았을 때여서 오전 9시에 서울을 출발해 오후 3시가 지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보지는 송림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길이라고는 좁은 길 하나뿐. 어둡기 전에 서울로 출발하려고 약 한 시간을
답사하면서 5만분의 1 군용지도에 주요 지점을 표시하는 한편 이 지점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그런데 그 곳 주민이 나를 간첩으로 오인해 신고하는 바람에 무장 경찰과 예비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손들어!』 하는
소리에 나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당시 해군 중령이었던 나는 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을 제시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나중에야
그 지역이 남파간첩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취약지역임을 알게 됐다.
답사 결과 예상대로 비행시험 최적지로 결론이 나왔지만 안흥지역은 말 그대로 오지 중에 오지였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어서
시골도 대부분 주택이 개량되고 전기와 전화가 가설됐는데, 이 곳은 전기 전화는커녕 집들도 옛날 초가 그대로였다. 비행시험장
건설을 위해서는 홍성에서 안흥까지 도로 개설 및 포장을 해야 했고 전기 전화, 생활용수 확보 등이 큰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비행시험장 건설 후 이 곳에 근무할 직원 200여명과 가족을 문화, 교육, 병원 등 편의시설이 전무한 벽지에 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청와대에서 지시한 대로 1978년까지 유도탄 공개시험을 차질없이 성공시키려면 시험장 건설과 장비 설치를 1977년까지는 완료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완벽한 비행시험통제와 자료수집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시험평가부에서 소개해준 미국 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계약하고 연구원 2명(정기원·제환영 박사)을 1년 6개월간 이 작업에
참여토록 했다.
통제소 건물(Mission Control Center, MCC)에 대한 사양은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화이트샌드 시험장,
남태평양상에 있는 미 육군의 콰잘레인(Kwajalein) 유도탄시험장과 일본 타네카시마(種子島) 인공위성 발사장을 방문해서 그
곳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다.
내가 방문했던 외국의 여러 시험장 중에서 미 육군의 콰잘레인 시험장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마침
미뉴트맨(Minuteman) 대륙간 탄도탄 시험을 참관할 수 있었다. 이 시험장은 남태평양 솔로몬군도에 있는 작은 산호도로
60년대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하기 위해 미국이 개발한 스파르탄(Spartan) 및 스프린트(Sprint) 유도탄을
시험하던 곳인데 미국 서해안에서 발사한 대륙간 탄도탄을 표적으로 시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소련과 ABM 조약이 체결되면서
요격시험은 중단됐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미뉴트맨 II의 MIRV 다탄두에 대한 정확도 시험을 하고 있었다. 미뉴트맨 탄도탄은 캘리포니아
공군기지에서 이 곳 산호초 호수를 겨냥해 발사하는데, 거리는 6400km에 불과하지만 비행시간은 최대 사거리의 비행시간과 같은
30분이 되도록 탄도를 조정해 놓고 있었다.
안내장교는 『우리는 항상 소련과 공동시험을 하고 있다』고 말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시험 때면 빠짐없이 원양어선으로 위장한
소련 첩보선이 영해 밖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은 3척이 몰려왔다』며 레이더 스크린을 가리켜 보였다.
1977년 9월, 마침내 안흥 비행시험장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공됐다. 유도탄 개발을 위해서 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
황무지에 모여 3년 동안 유도탄 비행시험장을 건설한다는, 처음에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꿈이 현실로 된 것이다.
시험장 건설 과정에 가장 큰 어려움은, 영화관 스크린 같은 대형 전시판에 유도탄의 비행상태를 영상이나 비행탄도를 실시간으로
비춰주는 천연색 프로젝터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이 프로젝터는 미군의 전략사령부(SAC)나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수출허가를 받을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앨라배마주 출신 모 상원의원을 통해 가까스로 미정부의
수출허가서를 얻었다.
한편 1974년 9월에 착공한 대전기계창 건설작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관작업으로 진행돼 76년 11월 말 준공됐다.
건설현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대전기계창은 이미 75년 6월에 500여명의 인원을 확보, 독립적인 유도탄연구 기구로 정식
발족돼 있었다. 76년 12월2일에는 박 대통령 임석하에 대전기계창 준공식이 있었다.
무모한 도전
대전기계창 준공과 더불어 창장으로 이경서 박사가 임명됐고, 유도탄 연구개발이 본격화됐다. 창장 이하 연구원 전원은 휴일도 없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지대지 유도탄(백곰·NHK-1) 개발에 매달렸다. 개발계획 초기에 1979년 말로 세웠던 개발목표 시기는 그
후 주한미군 철수가 구체화됨에 따라 1978년 국군의 날 이전으로 단축하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하달됐다. 이 때문에 국과연은
물론 관련 방산업체들도 목표달성을 위해서 「제2의 번개사업」 때 못지않은 돌관작업을 진행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당시 유도탄 전문가나 연구 및 생산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출발해 천신만고 끝에 미국 정부의 NH
유도탄 개량사업에 대한 양해를 얻어내고, 이에 따른 기술이전 및 추진제 제조장비의 판매승인으로 어느 정도 기반시설은 갖추게
됐다고 하지만, 2년 내에 유도탄을 개발해서 공개시사회를 갖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NH 유도탄 체계는 간단히 말해서 유도탄과 지상장비로 나눌 수 있고, 유도탄은 추진기관, 비행체, 유도조종장치 및 탄두로 나눌
수 있다. 연구요원들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우리가 개발한 유도탄 구성체계를 동시에 비행 시험하는 대신 개발구성품을 하나하나
비행 시험하는 4단계 연구개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1단계는 유도탄 개발에 핵심이라 할 유도조종장치 개발이었다. 특히 유도장치는 미제 NH 유도탄과는 달리 진공관을 반도체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부담이 더 컸다. 이를 위해 첫 비행시험은 미제 NH 유도탄에 우리가 개발한 국산 유도조종장치를 결합한
유도탄을 시험하기로 했다.
이 시험에서 국산 유도조종장치의 성능이 확인되면 2단계로 추진기관 시험을 하기로 했다. 미제 NH 유도탄에 우리가 개발한 국산
추진기관을 결합해서 비행 시험하는 것이다. 추진기관도 미제와는 달리 1, 2단 추진기관을 전부 비추력(比推力)이 큰 복합추진제로
대체했다. 2단계 시험이 성공하면 3단계로 국산 기체를 시험하기로 했다.
이런 순서로 구성품 시험이 성공하면 최종 단계로 우리가 개발한 유도조종장치, 추진기관, 비행체 등을 조립해서 만든 100% 국산
유도탄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개발계획은 후일 5공정부가 들어선 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일부 군부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연구요원들이 큰 피해를 보는 요인이 된다.
드디어 첫 비행시험
첫 비행시험은 반도체화한 국산 유도조종장치에 대한 시험으로 1978년 4월29일(토요일) 10시로 계획됐다. 개발요원들은 이미
2주 전부터 대전기계창에서 안흥시험장으로 유도탄을 운반해서 조립, 점검 등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시험 전 날 연구소장 주재하에
대전기계창 및 시험평가단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험·안전회의가 열렸는데, 국방부에서도 제3 방위산업국장과 유도탄과장이
참석했다. 처음 하는 시험이라 모두 긴장되고 불안해했다.
시험안전에 대한 책임을 맡은 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십 차례에 걸쳐 실시한 시험연습을 통해 시험통제 및 계측장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지만, 불안과 긴장 때문에 전날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유도탄은 서해안과 거의 평행하게 설정한 폭 29km의 바다 위를 비행해서 탄착지점에 낙하하도록 돼 있었고, 만일 유도탄이
시험구역을 벗어날 때는 안전을 위해서 공중폭파하도록 돼 있었다. 발사장과 탄착지에는 소개 구역이 2km 이상 됐지만, 중간
비행구역에는 수많은 어선이 산재할 뿐 아니라 이 광범위한 시험구역을 완전히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어떤
위험이 따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불안하고 긴 밤이었다.
유도탄 시험 발사는 정각 10시로 예정돼 있었지만, 유도탄 발사장과 탄착지 해상의 어선이 소개되지 않아 예정보다 1시간 57분이
지난 11시 57분에 발사됐다. 탄착 해역의 어선 소개는 해군함정이 담당했는데, 때마침 조기잡이철이어서 탄착 해역에 어선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는 어선들의 비협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험통제센터(MCC) 상단 벽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는 광학추적장치에 부착된 폐쇄회로 TV 카메라를 통해 발사준비가 완료된
유도탄을 천연색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그 옆 상황판에는 모든 발사절차가 완료됐음을 나타내는 푸른색 불이 전부 켜져 있었고,
가운데 패널에는 초읽기를 나타내는 LED의 빨간 숫자가 명멸하고 있었다.
실내 맨 뒷줄에는 시험을 통제하는 컴퓨터를 비롯해서 각종 계측 및 기록장비가 늘어서 있고, 가운데 줄에는 안전통제장비와
비행시험중인 유도탄이 정상기능을 상실할 경우 무선으로 폭파시키는 원격폭파장치, 맨 앞줄에는 유도탄과 시험장비의 이상 유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험통제판과 언제 어느 곳과도 교신이 가능한 통신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시험요원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평소 훈련 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MCC 안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넘쳤다.
레이더, 광학추적장치와 유도탄 내부 상태를 보여주는 원격측정센서들도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탄착지역에 나가 있는 해군과의 교신에도 이상이 없었다.
『발사준비완료. 초읽기 시작!, 발사 120초 전!』 마침내 시험책임통제원의 목소리가 옥내외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시험책임통제는 시험평가부장인 김동원 박사가 맡았다.
MCC 안에는 대형 유리벽을 통해 참관인들이 시험진행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약 30평 크기의 관람실이 마련돼 있었는데, 소장
이하 국과연 간부들과 국방부, 합참에서 온 참관인들도 초읽기에 들어가자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흥분과 긴장, 불안과 초조감이 범벅된 그 2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 10초, 9초 … 1초, 발사!』
시험책임통제원의 힘찬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MCC에서 1km 이상 떨어진 발사대에서 하늘을 치받을 듯 똑바로 서 있던 유도탄은
수십m나 되는 불기둥을 뿜으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현재 시간을 나타내는 대형스크린은 정확히 11시5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어서 건물을 뒤흔드는 우레 같은 굉음이 뒤따랐다.
MCC의 대형 스크린에는 유도탄이 비행하는 모습을 계속 비춰주고 있었다. 대형 TV 카메라가 광학추적장치에 연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안 돼 1단 추진기관이 예정대로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점화됐다. 그 순간 개발 및 시험요원과
참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렸다.유도탄은 계속 화염을 내뿜으며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음속을
돌파한 지 수십 초가 지났다. 유도탄이 멀어짐에 따라 대형 스크린에는 화면 대신 레이더의 추적자료가 그래프상에 입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유도탄 비행 고도, 거리 및 속도 등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유도탄은 모의시험 때처럼 예상 탄도를 그대로 그리며
비행하고 있었다.
첫 시험에서 유도탄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비행탄도를 따라서 날자 관계요원들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스크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뜻밖의 광경이 스크린상에 나타났다. 유도탄 개발이 그렇게 만만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행거리가 100km를 지나는 순간 유도탄이 스크린에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청천벽력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혹시 레이더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원격장치 등 모든 장비들을 점검했으나 어떠한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고,
유도탄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유도탄은 100km 떨어진 해상에 추락했음이 분명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첫 유도탄시험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보고서도 읽었고, 또 미군 유도탄연구소 방문중 시험관들로부터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므로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들었지만, 막상 첫 시험에서 낭패를 당하자 우리로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 또 실패…
다음 시험은 5월6일(토)로 정해졌다. 기상 등의 이유로 발사가 어려울 때는 다음날인 일요일에 실시하기로 한미 공군측과
합의했다. 그 전까지는 실패 원인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창장 이하 개발요원들이 각종 시험자료를 놓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분석했지만 유도탄의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어디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2호기의 발사준비 점검은 1호기에 비해 이중 삼중 더욱 철저하게 하였다. 시험장에 도착한 유도탄의 구성품과 체계점검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 실패하면 9월로 예정된 공개행사에 큰 지장이 생길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5월6일, 날이 밝았다. 날씨도 청명했고 해상 통제도 잘 돼 모든 시험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늘은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 번째 시험이라 지난 번에 비해 한결 마음에 여유도 생기는 것 같았다. 지난번처럼 국방부와 합참 관계관들도
모두 참석했다.
10시 정각, 2호기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안고 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스크린에는 1단 추진기관이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점화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고, 유도탄은 1호기와 같이 계획된 탄도를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꼭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1호기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천당과 지옥 사이
제3차 시험일인 6월3일, 날씨는 쾌청했다. 개발요원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마음으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소장 이하 모든 간부들은 이번 시험마저 실패한다면 9월로 잡혀 있는 공개시험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지연된 스케줄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발사준비와 어선 소개가 순조롭게 이뤄져 유도탄은 10시 정각에 힘차게 창공을 향해 솟아 올랐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1단 추진기관이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도 이상없이 점화됐다.
유도조종 소프트웨어의 변경으로 비행탄도는 종전 시험 때와는 달랐으나 비행중인 유도탄은 마(魔)의 18km와 100km 지점을
무사히 지나 탄착지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적막 속에서 시험책임통제원이
주기적으로 마이크를 통해 『사거리 쭚쭚쭚km, 고도 쭚쭚km』 말하는 소리만 유일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결같이 『제발 이번만은
꼭』 하고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유도탄은 마침내 표적 상공에 이르러 표적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표적에 정확히 명중했다! 탄착지 관측요원으로부터
탄착 보고가 들어왔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기어코 해낸 것이다! 소장 이하 모든 연구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유도장치 개발실장이었던 김정덕 박사와 실원들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큰 소리로 울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당시 우리가 흘린 눈물은 감격과 환희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1971년 박대통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고,
오늘의 결과를 얻기 위해 6년여 동안 밤잠 한번 편히 자지 못하고 계속돼온 긴장감이 일시에 풀리면서 엄습해오는 허탈감의
눈물이기도 했다.
성공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다음날의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시험자료처리 요원들은 밤을 새워 시험자료를 분석했다. 다음날 실시한
제4차 비행시험도 성공이었다. 이로써 소장 이하 모든 「백곰」 개발요원들은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백곰시험 성공을 보고받은 박대통령은 국방부를 통해 유도탄 공개 시사를 위한 행사준비를 국과연에 지시했다. 확정된 행사계획은 추후
시달할 것이나 시기는 9월 중으로, 공개시사는 백곰 유도탄 외에 당시 대전기계창에서 개발중이던 한국형 대전차 로켓(KLAW),
다연장 로켓(九龍) 및 중거리 로켓(黃龍)도 포함하라는 내용이었다. 백곰과 KLAW는 9월 공개 행사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1977년 7월부터 개발에 착수한 다연장 로켓와 중거리 로켓는 그 때까지 준비가 될지 걱정이었다. 이 지시로 국과연은
더욱 바빠졌다.
제5차 비행시험은 최종적으로 자체 개발한 추진기관을 시험하기로 하고 날짜를 7월22일로 정했다. 추진기관에 대한 시험이 끝나면
기체, 유도조종장치 및 추진기관 등 모두 국산 구성품으로 조립한 유도탄 시험이 8월에 계획돼 있었다. 공개행사 날짜가 이미
9월로 정해졌기 때문에 앞으로의 시험은 절대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생각지도 않은 레이더(MTR) 운영요원의 추적 실패로 5차 비행시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2개월도 남지 않은 공개행사를 생각하면서 요원들 모두는 몸서리를 쳤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제5차 시험은 실패했으나 8월26일 계획대로 완전 국산 유도탄의 제6차 비행시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제6차 비행시험을 성공리에 마쳐 요원들은 공개행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안도했다.
그러나 공개행사를 앞두고 최종적으로 9월6일 실시한 제7차 시험에서 뜻하지 않은 2단 추진기관의 점화실패로 유도탄은 발사장에서
10km 전방 해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해군의 도움으로 수중에 있는 유도탄을 인양해서 조사한 결과, 2단 점화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추진기관팀이 밤을 새워가며 이를 수정, 9월16일 또 한 차례 비행시험을 실시했다
이날 시험은 9월26일에 열릴 공개행사 예행연습을 겸해서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임석한 가운데 열렸다. 행사계획 순서에 따라
KLAW 6발, 구룡 28발, 황룡 1발 및 백곰 순으로 시험이 진행됐다. 다행히 모든 시험이 성공리에 끝났다.
시험 결과에 만족한 국방장관은 시험장을 떠나기 앞서 치하와 함께 몇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 후 25일(월) 최종 점검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심소장도 이번 공개 시험발사는 국가적 행사로 국과연의 운명이 달린 일이니 각자 최선을 다해 좋은 결실을
맺자고 당부했다. 그러나 지난 4월1일부터 9월16일 사이에 치러진 8차례의 백곰 비행시험에서 불과 50%인 4회의 성공률을
가지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외 귀빈 및 언론인 다수가 참석하는 공개행사를 치를 수 있을지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담배 은박지로 푼 마지막 시련
9월에 들어와 공개시험행사에 대한 세부내용이 국과연에 시달됐다. 행사 일자는 기상 이변이 없는 한 9월26일(화)로 정해졌다.
박대통령을 비롯해 국방장관, 합참의장 및 3군 총장 등 국방 수뇌 외에도 행정부, 입법부 및 관련 방위산업체, 외부인사로는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방송사와 중앙 일간지 기자들도 참석하게 됐다.
이것은 단순한 국산 유도탄에 대한 시사회 차원의 행사가 아니었다.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북한에 대해 한국의
방위산업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전쟁도발을 억지하려는 박대통령의 고도로 계산된 의도가 숨어 있는 행사였다. 국가보안목표 「가」급으로
지정돼 국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어떤 외부 인사도 출입할 수 없는 안흥 시험장을 행사 당일 언론에까지 공개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런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시험품목이 늘어남에 따라 관람석도 MCC 내부의 관람실에서 옥상으로 옮기기로 하고, 긴급히 관람대를 설치했다. 관람대에서 모든
시험을 다 볼 수 있도록 KLAW, 구룡, 황룡 및 백곰 순으로 시험장 위치를 정했다. KLAW 시험은 관람석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 시험하게 됐는데, 탄의 명중도뿐만 아니라 관통력도 볼 수 있도록 장갑판으로 표적을 만들었다.
옥상에 관람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MCC로부터 1.2km 떨어진 기존 백곰 발사장을 2.5km 떨어진 곳으로 옮겨야
했다. 발사장을 옮기는 것은 발사대 뿐 아니라 각종 케이블도 함께 옮겨야 하기 때문에 매우 큰 공사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하마터면 행사 당일날 백곰시험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다.
백곰 발사장의 이동공사가 9월22일(금) 끝나 백곰개발팀은 23일부터 새 발사장에서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추적 레이더가
발사대에 서 있는 유도탄을 잡지(Lock-on)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백곰은 레이더로 유도되는 유도탄이기 때문에 레이더가
유도탄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곧 유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적 레이더와 유도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원래의 발사장에서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달라진 것이라면 발사장을 추적
레이더로부터 종전보다 2배 거리에 떼어놓은 것뿐이었다. 레이더의 반사파 때문으로 생각하고 레이더와 발사대 사이의 언덕을 깎고 또
반사파의 강도를 줄이기 위해 풀을 태워 재를 만들어 땅을 덮어 보기도 했지만 별무 효과였다.
이런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 공개행사 하루 전인 25일 아침에 노재현 국방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최종점검차 안흥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구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봤지만 소득이 없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버렸다.
심소장은 국방장관에게 행사준비 현황과 문제점을 보고했다. 당시 필자도 이경서 박사와 함께 그 자리에 배석했는데 소장의 보고가
너무나 비장해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번 행사는 장관이 주최자로서 대통령 이하 귀빈들을 초청하는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장관의 난감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못 피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을까.
참으로 절망적이고 암담하였다. 장관은 행사를 취소하면 취소했지 백곰이 빠진 공개시험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후, 금일
중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즉시 보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안흥을 떠났다.
마지막 해결방법은 백곰 발사대를 예전의 발사장으로 다시 옮기는 것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또 1972년 4월3일
제1차 국산병기 공개시사회 때 일어난 대전차 지뢰 사고도 있어서 옥외에서 시험을 관람하는 한 안전관계상 옮길 수도 없었다. 실로
진퇴유곡이 아닐 수 없었다.
참담한 소장의 얼굴을 이경서 박사와 나는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백곰사업 책임을 맡고 있는 이박사의 표정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소장은 곧 간부회의를 소집했지만, 분위기는 너무나 침통했다. 심소장은 『역사적인 유도탄 개발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예기치 못한 문제로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됐다. 만에 하나라도 내일 행사에 차질을
빚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모두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되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 모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비장한 각오를 토로했다.
문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유도조종부를 책임지고 있던 최호현 박사의 얼굴은 너무나 처참했다. 소장 이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최박사는 계속되는 밤샘작업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최박사는 마침내 미군의 NH 유도탄 교범 속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새로 옮긴 발사장에는
레이더의 주전파 외에 지면과 해수면을 통해 들어오는 레이더 반사파 때문에 레이더파의 강도가 대폭 증가하는 소위 rf-플레밍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 전자파의 강도를 줄이려면 유도탄 수신 안테나에 감쇠마개(attenuator cap)를 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감쇠마개를 구할 수 없어 급한 대로 담뱃갑 안의 은박지를 뜯어내 수신 안테나를 감싼 결과 비로소 추적 레이더가
유도탄을 붙잡게 됐다. 최박사는 훗날 『알고 보면 이렇게 쉬운 것을 몰라 그간 죽을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새삼 콜럼부스의 달걀이
생각나더라』고 말했다. 이 결과는 곧바로 장관에게 보고됐고, 운명의 26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날아가는 유도탄을 차마 보지 못하고… 드디어 26일 아침. 극도의 긴장과 초조감으로 지샌 밤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높기만 한 전형적인 가을날씨였다. 서산 측후소로부터 오늘 이 곳 날씨는 『오전에는 맑다가 오후에는 구름 다소』라는 연락을
받았다.
행사는 정각 13시, 대통령의 도착과 더불어 시작하도록 예정돼 있었다. 박대통령을 비롯하여 3부 요인과 이민우 국회부의장,
정래혁 국방분과위원장, 노재현 국방장관, 최각규 상공장관,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벳시
주한미군사령관 및 국내 보도진 등 100여명이 이날 안흥시험장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국과연의 주요 연구원 및 경비를 위한
32사단 장병들로 안흥시험장은 갑자기 북적거렸다.
대통령이 도착한 후 곧바로 소장의 인사말, 이경서 박사의 시험계획에 대한 보고, 그리고 시험장 현황과 경계에 대한 필자의 보고가
이어졌다. 시험장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대통령 전면에 놓인 대형 괘도에는 그 날 실시하는 시험품목과 각 시험장 위치를
나타내는 요도를 전시했다
원래 계획에는 KLAW, 구룡, 황룡의 시험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백곰을 시험하도록 돼 있었지만, 혹시 또 레이더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라고 생각해 백곰부터 발사하기로 했다. 관람석에는 참관인들을 위해 TV 모니터 3대를 설치해 유도탄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계속 비행탄도를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모든 보고를 마친 후 시험책임통제원 김동원 박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힘차게 흘러나왔다. 『시험준비 끝. 초읽기 시작. 발사
120초 전!』 스피커에서는 카운트다운이 계속됐다. 『…10초, 9초, 8초 … 1초, 발사!』 백곰은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14시13분34초.
이경서 박사와 나는 대통령 보고를 마치고 단하에서 경호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얼마나 긴장되고 초조했던지 유도탄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 채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내 손을 잡은 이박사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발사된 유도탄은 1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점화되면서 더욱 가속하다가 얼마 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관람석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비행탄도가 3차원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장내 스피커에는 시험통제원이 비행시간, 고도 및
비행거리 등을 알리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사이 사이에 유도탄사업 통제단장인 강인구 박사의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박대통령도 쌍안경에서 눈을 뗀 후 소장의 설명을 들어가며 모니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유도탄이 쭚쭚쭚km 떨어진 목표 상공에 도달해 표적을 향해 수직낙하 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유도탄이 표적지
해면에 낙하하면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의 중계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에 나타났다. 시험책임통제원의 『탄착!』 목소리과 함께
대통령 이하 단상의 모든 참관인은 박수를 쳤고, 일반 참관인들은 환성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몇 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오늘의 성공만을 기원하던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졸였던 백곰 공개시험이 성공한 것이다. 1978년 9월26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유도탄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이었다.
박대통령의 일기
이어서 행사 순서에 따라 관람대에서 200m 떨어진 계곡에서 KLAW 활성탄 6발이 장갑판 표적을 향해 발사됐는데, 명중할 때마다 귀를 찢는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표적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다음, 500m 떨어진 언덕에 설치된 다연장로켓 발사대 2대에서는 처음에는 로켓 1발씩이 표적을 향해 발사된 후 이어서 로켓탄
56발이 0.5초 간격으로 10km 떨어진 무인도를 향해 발사됐다. 당시의 다연장로켓 발사대는 지금과는 달리 28연장이었다.
발사대 주위는 추진제 매연이 가득했고 탄착지는 울리는 폭음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중거리 로켓 4발이 관람석에서 1.2km 떨어진 발사대 4개에서 해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면서 이 날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시험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감격스러운 듯 시험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면서 심소장과 힘찬 악수를 교환했다. 행사계획에 따라 나는
박대통령을 MCC로 안내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오늘 시험한 백곰의 탄도가 게시돼 있었다. 시험통제장비와 시험데이터 처리장비,
각종 시험 안전장비와 시험장 내부는 물론 육·해·공군과 교신에 쓸 통신장비 등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이중 몇 가지 장비는
시험평가단이 자체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 보는 각종 장비들이 신기했는지 이것 저것 질문을 한 뒤에도 MCC를
떠날 줄을 몰랐다.
이어서 박대통령은 이경서 박사의 안내로 MCC 건물 앞에 분해해서 전시한 백곰, 구룡, 황룡 및 KLAW의 구성품들을 돌아보며 국산 유도조종장치, 1·2단 추진기관, 기체 및 탄두 등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박대통령은 도열한 연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사명감에 불타는 우리 젊은 과학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오늘의 성과를
거두었음을 치하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록에는 박대통령이 이 날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고 나와 있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유도무기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다.
① 대전차 로켓 ② 다연장 로켓 ③ 중거리 로켓 ④ 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아웅산에서 당한 全統 '현무' 빨리 개발하시오
한국의 「백곰」 유도탄 개발 성공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또 외제무기에 의존해오던 우리의 안보를 자주적으로
고양하는 데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되돌아보면 내가 1972년 12월27일 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고 공개행사를 치르기까지
6년에 불과한 기간에 전문가 한 사람 없고, 연구시설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유도탄을 개발해냈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유도탄 개발계획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1974년 5월에 이뤄졌지만, 연구·시험 및 생산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유도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6년부터였다. 비록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을 모방한 것이지만 유도탄의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및 탄두 등은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한 것들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유도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박대통령의 절대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휴일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쓴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 정부는 각종 훈포장과 포상으로 연구개발에 기여한 연구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선진국의 전유물처럼 생각됐던 유도탄을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백곰 공개시험 후 국방부로부터 새로 창설될
시험 포대를 위한 실용개발 지시가 국과연에 하달됐다. 군과 국과연은 80년까지 수행된 실용개발기간 중 모두 8회에 걸친
운영비행시험을 통해서
백곰 유도탄의 성능 및 실용성을 확인했다. 그 후 생산에 들어가 80년 말에 새로 창설된 시험포대에 1개 포대분의 국산 유도탄이
배치됐다. 유도탄 추적 레이더를 제외한 국산화율은 90%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곧 부메랑이 돼 국과연
연구진을 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상처뿐인 영광
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국과연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됐다. 5공정부 출범과 함께 박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던 방위산업은 국방부와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에 위임되고, 방위산업에 사령탑
역할을 했던 청와대 제2 경제비서실도 폐지됐다. 박대통령의 이른바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정책」은 5공 정부에 의해 근본부터
바뀌게 됐다.
5공정부의 군 당국은 시간이 걸리는 국내 연구개발에 의한 전력증강보다는 외국에서 첨단무기를 도입하거나, 핵심기술 이전이 수반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술도입 생산을 통해서라도 북한에 비해 현격히 떨어져 있는 전력을 하루 속히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과연이나 방산업체들은 단기간에 걸쳐 최첨단무기를 개발하라는 군의 요구에 부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80년에 불어닥친 유류파동 때문에 중화학공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돼 방위산업체들도 대폭 정리됐다.
전력증강을 위한 율곡예산이 해외도입과 기술도입 생산 위주로 집행됨에 따라 국내 연구개발사업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국과연의
연구개발 예산도 70년대의 국방예산 대비 4%에서 1.3%로 대폭 감축됐다. 이와 더불어 새 정부의 숙청 한파가 국과연에도
불어닥쳐 두 차례에 걸쳐 약 1000명의 인원이 감축됐고, 조직도 대폭 축소돼 서울의 연구소 본부와 서울사업단이 폐쇄되고
대전기계창으로 통합됐다.
이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3년 전에는 유도탄 개발 공로로 정부로부터 각종 서훈과 포상의 영예를 한몸에 받던
연구원들이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대통령 당시 제2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씨가 「신동아」에 이미 밝혔기 때문에(『유도탄개발, 전두환과 미국이 막았다』 1996년 1월호) 여기서는 간단히 그 결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자 한다. 새 정부의 방위산업정책 변화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지대지 유도탄 체계 개발이 중단됨에 따라
백곰의 후속사업이었던 K2, K3 및 K5 유도탄 개발계획도 완전 중단됐다. 유도탄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시부터 『78년 9월26일에 공개 시험한 백곰 유도탄은 국산이 아니라
미제 NH 유도탄을 페인트칠로 위장한 것이다. 국과연은 만들지도 못할 유도탄을 개발한다면서 수천억원의 예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기만했다』고 믿고 있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그런 말을 했다. 한 예로 전대통령이 대전기계창을
방문해서 국산무기 전시실을 둘러보는 자리에서도 당시 소장이었던 서정욱(徐廷旭) 박사에게 그런 의혹을 제기해 서소장을 당혹케
했다. 전대통령뿐 아니라 당시 군의 최고위직이었던 김윤호(金潤鎬) 합참의장도 같은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다.
졸지에 '죄인'된 유도탄 개발 주역들
이러한 오해는 백곰을 개발할 때 유도조정장치, 추진기관 및 기체 등 주요 국산 구성품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미제 NH
유도탄을 10여발 구입해다가 시험한 데서 생긴 것 같았다. 이런 오해는 또 유도탄 개발이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됐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당시 연구소 안에서도 유도탄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대통령과
군의 최고위 인사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됐으니 국과연, 특히 유도탄 개발연구 부서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두 차례에 걸친
숙청작업으로 연구소를 떠난 1000여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대전기계창 소속이었다. 유도탄 개발에 참여한 부장급 이상 간부는
이경서(李景瑞) 창장을 포함해서 전원이 숙청됐고, 실장도 상당수 포함됐다. 특히 해외에서 유치한 과학자들의 퇴직이 많았다.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로 인해 국과연의 유도탄 개발능력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됐다.
특히 수백만 달러를 들여가며 외국에서 핵심기술을 배워온 간부들이 전원 그만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개중에는 유도탄
개발에 전념하느라 건강과 가정까지 희생한 사람도 있었다. 전문인력은 하루 이틀에 양성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하루 아침에
국가의 죄인으로 치부해 숙청해버린 것은 국가안보상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권국가로서 기술집약형의 자주국방을 확립하려면 정밀무기체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도탄 개발에 매진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책무일 텐데 5공 정부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루 아침에 핵심 연구요원들을 숙청하고
체계개발을 중단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이 추정하는 것처럼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든, 아니면 그릇된
보고에 따른 전대통령의 오해 때문이었든 간에 유도탄 개발사업의 중단과 연구요원들의 대대적 숙청은 결과적으로 국가안보에 큰 손상을
끼쳤다. 그러나 뒤에 설명하겠지만, 정부의 그런 조치는 잘못이었음이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실로 입증됐다.
이 기회를 빌려 필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을 위해 정열과 혼신의 힘을 바쳤던 수많은 연구 주역들의 명예를 위해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78년 9월26일 공개시사회에서 발사된 백곰은 비록 미국의 NH유도탄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유도탄 전 분야에 걸쳐 성능을 개량했을 뿐 아니라 90% 이상 국산품으로 구성된 「국산」 유도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1982년 9월, 나는 지상무기(육군)를 개발하는 1사업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새 소장으로
김성진(金聖鎭) 박사가 부임했고, 나는 소장을 대신하여 한미안보회의(SCM) 산하 기술협력위원회(TCC)의 공동위원장을 맡게
됐다. 양국 국방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한미안보회의에서는 안보·군수·기술 및 공동성명의 4개 실무위원회를 운영했다. 안보 및
군수협력위원회는 국방부 차관보, 공동성명위원회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차관보, 그리고 기술협력위원회는 국과연 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소장이 부임한 후 1983년부터 국과연 소장 대신 내가 맡게 된 것이다.
1983년 10월, 한미기술협력 실무위원회에 참석차 워싱턴에 머물던 나는 그 곳에서 경천동지할 소식을 접했다. 바로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저지른 아웅산 사건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부총리를 비롯해 정부고관 17명이
사망했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급거 귀국한 전대통령은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고, 이때 국과연 소장이던 김성진
박사는 체신부장관으로 영전했다. 이에 따라 국과연에도 후속 인사가 단행돼 박덕호 부소장이 소장직을 맡게 됐고, 나는
한미기술협력회의에서 귀국 후 연구개발단장직을 맡게 됐다.
구사일생 생환한 합참의장 병실에서
새 보직으로 업무파악에 정신이 없을 때 윤성민(尹誠敏) 국방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한미기술협력 실무위원회의 결과를 묻는 호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장관실로 가니 윤장관은 『함께 갈 데가 있다』며 급히 문을 나섰다. 그런데 국방부 청사 현관에 대기한 승용차가
장관 전용차가 아니라 흰색 외제차였다. 장관 행차에는 항상 따라붙는 수행 부관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장관이 일절 말씀을 안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청사를 빠져 나온 차는 김포공항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차는 김포에 있는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윤장관을 따라 5층의 한 병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병실 안에는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이 머리와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양 다리에도 발 끝까지 깁스를 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웅산
사건 때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후, 필리핀의 클라크 미군기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귀국한 직후였다.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합참의장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대하니 북한의 만행에 다시 한번 몸서리가 쳐졌다.
병실에 들어서고 잠시 후에 윤장관이 유도탄 얘기를 꺼내 비로소 나를 이 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합참의장이
윤장관의 말을 받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국가대사인 88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지, 설령
예정대로 개최된다 해도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북한은 수단방법을 다해서 88올림픽 개최를 방해하려 들 것이
뻔한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과연은
늦어도 88올림픽 전 해인 87년 말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 실전 배치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라.
이것은 각하의 명령이다』합참의장의 목소리는 자못 흥분과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국과연이 800여명을 감원했을 때 유도탄 개발요원이 가장 많이 옷을 벗었고, 나를 제외하고 부장급 이상 간부들은 전원
퇴직했다. 뿐만 아니라 금년(83년) 1월1일을 기해 유도탄이 연구사업으로 바뀌면서 K2 사업팀도 완전 해체된 상태다. 따라서
종전의 절반도 안 되는 연구원을 데리고 87년까지 유도탄을 실전 배치하라는 지시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예상으로는
87년까지 유도탄을 개발하기도 지극히 어려울 것 같은데, 한 걸음 나아가 실전배치까지 완료하려면 유도탄을 양산하고, 종합
군수지원체계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하고, 또 각종 교범을 만들어 유도탄 운영 요원을 교육·훈련하고, 진지공사에 대한 규격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 이런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솔직하게 나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기백 합참의장과는 미국에서 열린 안보회의 때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여러 차례 접해봤기
때문에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시 합참의장은 기술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 한미안보회의 때 기술협력 내용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여주곤 했다. 나의 자신없는 답변에 합참의장은 붕대를 감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하라』고 명령 겸 부탁을 했다. 윤장관도 『유도탄 긴급개발 지시는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중대사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돼야 한다. 이른 시일내에 개발계획서를 국방부에 제출하라.
필요한 예산은 전액 배당할 것이고, 증원이 필요하다면 승인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지난 연말에 있었던 국과연의 대폭적인
기구축소와 인원감축을 승인한 사람으로서 사업을 기간내에 추진하는 데에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은 다시 한 번 한없이 높아 보이기만 하는 벽에 부닥치게 됐다. 그래, 지난 72년 말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았을 때에도
결국은 백곰을 성공리에 개발해내지 않았던가! 비록 지금은 많은 과학기술자들을 잃어버렸지만, 불모지에서 시작했던 그 때보다는
그래도 여건이 나은 편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를 호출해 합참의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데려와 유도탄 개발을
지시한 것은, 아마도 국과연의 현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윤장관이 나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북방을 지키는 신' 현무(玄武)사업
생각할수록 참으로 묘했다. 국과연에 입소해 로켓 개발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박대통령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전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다시 받게 됐으니 유도탄과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고, 이제는 모든 일이 성공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이 우리 역사상 처음 열리는 올림픽대회를
성공리에 마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 이상 큰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국과연에 돌아와 소장에게 보고하니 소장도 크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87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전 배치를 해야 한다는 엄명을 받은 터라 한시가 급했다. 유도탄과 관련된
부·실장을 소집해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유도조종부장 박찬빈 박사, 탄두부장 윤여길 박사, 추진기관부와 추진제공장을 맡고 있는
이채우 박사와 사업관리실장 및 각부 관련실장들에게 유도탄 긴급개발에 대한 국방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유도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을 체계실장으로 문신행 박사(文信行. 현 항공우주연구소 사업본부장)를 임명 건의하기로 하고,
유도탄체계는 중단됐던 K2를 기본으로 각 구성체계의 개발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유도탄사업 명칭은 현상공모를 통해서 「북방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 담긴 「현무(玄武)」로 결정됐다. 83년 11월29일, 현무사업계획에 대한 국방부 승인이 나왔다. 그러나
정상적인 율곡사업 집행절차에 따라 사업이 승인된 것이 아니라 긴급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사업의 긴급성 때문에 사업집행절차를
생략하고 선행개발, 실용개발 및 생산에 대한 예산이 일괄 승인됐기 때문에 사업을 착수하는 데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현무사업에 대한 군 실무자들의 준비가 부족해 현무에 대한 작전·운용·성능(ROC)의 세부사항을
합의하는 일이었다.
현무의 연구개발 및 생산뿐 아니라 현무를 정비·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대요원 교육, 30권이 넘는 정비교범 및 정비부품 준비 등
종합군수지원 문제도 적지 않은 일이었다. 82년 말 유도탄 연구원들이 대량 감원된 터라 부족한 연구인력을 60명 충원하도록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새로 보충한다 해도 유도탄 지식이 전혀 없는 연구원들이 사업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정상적인 무기개발 과정은 선행개발, 실용개발을 거쳐 부대시험에 합격한 후 생산 배치하는 순서를 거치지만 현무사업은 완료시기를
엄수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개발 및 생산계획을 정상적인 순서에 따라 추진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이에 따라 사업계획은
현무의 부대배치시기(IOC)로부터 역산해서 연구개발 및 생산계획을 작성하고, 선행개발, 실용개발 및 생산기간이 중첩되는
비정상적인 사업계획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 제약과 연구인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연구원들과 방산업체 요원들은
불철주야로 사업에 매달렸다. 이들의 열의와 헌신적인 노력은 「번개사업」 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드디어 84년 9월22일 시제한 현무 유도탄을 시험(DT-I)하게 됐다. 안전을 고려해서 첫 비행시험은 사정(射程)을 단거리로
계획했다. 과거 「백곰(K-1)」의 비행시험을 10회 가까이 했지만, 긴장감은 그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시험 전날인 21일은 참으로 긴 하루였다. 유도탄의 최종 점검결과도 이상이 없었고 시험평가단과의 안전회의 및 해역과 공역에 대한
해공군의 협조도 원만하게 이뤄졌다. 유도탄 발사 후 유도탄에는 아무 이상이 없더라도 추적 레이더의 문제로 3초 이상 유도탄을
추적하지 못할 때에는 안전을 위해서 유도탄을 자동 폭파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긴 토의가 있었다. 현무는 백곰과는 달리 레이더
지령 유도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비행하는 유도탄을 단순히 추적 레이더의 잘못 때문에 폭파시켜야 하느냐에 대해서
이의제기가 많았다. 딴은 일리있는 얘기였지만 사업책임을 맡은 나로서는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인명피해를 생각해서
자동폭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험비행 성공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이번 시험은 본디 9월1일로 계획돼 있었는데 늦장마가 계속돼 유도탄을 발사대에 장착한 채 3주일을
야외에서 대기했다. 또 이번 시험은 백곰시험 때와는 달리 고정 발사대가 아닌 이동형 발사대에서 발사하는 첫 시험이었다. 나는
78년 4월29일 백곰의 첫 시험이 실패했던 일과 81년 K-2 유도장치시험 때 발생한 사고가 뇌리를 떠나지 않아 시험발사 전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샜다. 특히 81년 8월21일 K-2유도탄 비행시험 때의 악몽 같은 사고가 자꾸 떠올랐다. 당시
K-2유도탄사업 책임자였던 최호현박사는 백곰의 레이더 지령 유도방식을 관성유도장치로 대체한 새로운 유도탄의 비행시험을 하고
있었다. 백곰사업 때 확보한 미제 NH 잉여탄이 있어 새 유도장치를 시험할 때 NH 유도탄을 사용했다.
NH 유도탄의 1단 추진기관은 추진기관 4개를 한데 묶은 클러스터(Cluster)형이다. 이는 추진제만 다를 뿐 북한
노동미사일의 1단 추진기관과 유사한 방식이다. 새 유도장치를 탑재한 NH유도탄은 10시 정각에 발사됐는데, 발사 순간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다. 발사명령이 떨어지면 4개로 된 1단 추진기관이 일제히 점화돼야 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그중 하나가 점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간 10차례 시험하는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발사대는 해안가에 설치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점화되지
않은 추진기관이 육지 쪽에 있었다. 발사 순간 균형을 잃은 유도탄은 육지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낮은 고도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
쪽으로는 40여호의 농가가 있었고 그 너머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탄두는 비활성이었지만 1단 및 2단 추진기관에는 폭약이나
다름없는 추진제가 다량 들어 있었고, 기체 및 유도조종장치의 무게도 수t에 달하기 때문에 지상과 충돌하면 피해가 얼마나 클지
몰랐다.
모두가 망연자실해 있는 가운데 언덕 너머에서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대기중이던 소방차와 구급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유도탄은 발사장에서 1.5km 떨어진 시험장의 경계선 밖 언덕에 추락한 뒤 일부 파편과 불붙은 추진제가
농가에 떨어져 불이 번지고 있었다. 농가 5동이 파손됐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피해가 크지 않은데다 사고수습반의
신속한 피해보상 조치로 사태를 원만히 해결했으나 해저유물탐색 취재차 인근에 와있던 방송국 취재팀을 납득시키느라 혼이 났다.
지금도 당시 보도관제에 적극 협조해준 취재팀에 고마움을 느낀다.
점화되지 않은 추진기관을 비롯해서 잔해 대부분은 회수했으나 문제의 열쇠인 점화장치는 경비대 병력까지 동원해서 3일간 정밀
수색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불량부품 하나가 이렇게 큰 실패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부품 하나하나의 신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 사고 이후 추진제 연구팀은 자체 기술로 미제에 비해 성능이 월등한 단일 추진기관을 개발해 이런 사고를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번 현무 발사시험에는 1단 추진기관이 단일 추진기관이어서 그런 사고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81년의 사고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9월22일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아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발사예정시각은 오전 10시. 그러나 어선통제 때문에 11시50분에 발사할 수 있었다.
초읽기가 끝나자 추진기관이 점화됐고, 현무는 엄청난 굉음과 불기둥을 내뿜으며 힘차게 비상했다. 초조와 불안 속에서 진행된 첫
비행시험은 성공적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이동형 발사대에도 이상은 없었지만 화염반사판을 더 가벼운 내열 복합재로 대체하기로 했다.
제2차 비행시험은 1차 비행시험 자료를 심층 분석하고 군과 세부적인 ROC 협의를 위해 85년에 실시하기로 했다. 비행시험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모든 구성품이 설계대로 작동돼 곧바로 장거리 비행시험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2차 비행시험은 85년
5월25일, km 떨어진 무인도를 향해 발사됐는데, 공산오차보다도 목표지점에 훨씬 가깝게 명중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국방부를 통해 현무 시험결과를 보고받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현무 개발현황을 이른 시일 안에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청와대 보고
유도탄 보고는 85년 6월27일 11시에 청와대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윤성민 국방장관, 정진권 합참의장 및 박덕호 국과연
소장이 배석했다. 김용래 의전수석비서관이 보고 요령을 설명해줬다. 보고는 백곰 유도탄의 개발경위, 국산화 내용 및 예산내용에
이어 현무의 차이점, 구성품을 시제하는 방산업체 및 국산화율과 2차 시험내용, 향후 사업계획의 순서로 보고했다. 앞에도 말했지만
전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 때부터 백곰 유도탄이 국산품이 아니라 미제 NH 유도탄에 페인트칠만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날 보고에서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주요 구성품의 제작장면을 담은 앨범을 준비했고, 비디오로 현장 화면을 곁들여서
설명했다. 전대통령은 이미 군 정보기관을 통해서 현무의 시제업체와 국산화 현황뿐 아니라 탄착지점까지 보고를 받아 현무사업에 대한
주요 내용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보고는 예정시간 20분을 훨씬 넘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마침 그 날은 전대통령이 국빈방문중인 방글라데시 대통령과 12시에 오찬약속이 돼 있던 날이었다. 김용래 의전수석이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정문을 통과했다고 알리자 전대통령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힘차게 붙잡으며 『비행시험 성공을
축하한다. 수고했다. 지난번 것(백곰)은 미제에 페인트칠한 것이었지만 이번 것(현무)은 제대로 된 것 같다. 더욱 열심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다음번 시험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관하겠다』고 말했다. 윤 국방장관과 정 합참의장도 보고 결과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백곰 시험발사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루었을 때,
우리도 이제 독자적인 유도탄 기술기반을 구축하게 됐다고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5공정부 수립 이후 유도탄 개발이 중단되고 핵심 연구요원 대부분을 강제 퇴직시킨 지 10개월도 안 돼 거의 처음부터 다시 유도탄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 과정에 치러야 했던 국가적인 손실은 또한 얼마나 컸던가. 그런데 그런 손실이 전대통령의 백곰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이런저런 상념으로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보고 후 곧 현무
비행시험에 전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시금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얼마 전 서독에 배치된
미육군의 퍼싱(Pershing) II 유도탄이 사격훈련 중 공중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현무는 그 때까지 두 차례
비행시험을 했다고 하지만 장거리 시험은 단 한 차례밖에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튼 다음 시험이 계획된 9월에 대통령이 참관하는
시험비행 행사를 갖기로 결정됐다. 예비설계 단계에 대통령을 모시게 됐으니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대통령의 현무 시험 참관
현무 비행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행사준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가장 시급한 일은 78년 9월26일 백곰 공개시험 때 MCC
옥상에 급조했던 관람대가 너무 낡아 새로 보수하는 일이었다. 시험은 백곰 때와는 달리 비공개로 결정됐다. 행사일자는
9월18일(수). 그러나 측후소의 기상예측과는 달리 9월14일부터 시작한 늦장마로 연일 비가 내렸다. 측후소에서는 21일에나
비가 그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장마는 참으로 괴상했다. 낮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리다가도 밤에는 별이 보일 정도로
구름이 걷히는 날씨가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청와대에서는 날씨만 허락하면 대통령께서 꼭 참석할 것이니 주말까지 시험준비 상태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비는 20일(금) 오후부터 멎기 시작하여 석양 무렵에는 실로 오랜만에 햇빛을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행사가 21일로 결정됐다. 전대통령은 11시50분 국방장관 및 합참의장을 대동하고 안흥시험장에 도착했고, 각군 참모총장,
2군사령관 및 보안사령관 등 군수뇌 다수도 참석했다. 비행시험은 오찬 후 오후 2시에 실시됐다. 현무의 시험절차와 초읽기는 백곰
행사 때와 똑같았다. 비행시험은 대성공이었다. 시험 후 전대통령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관계관들을 치하하는 한편 처음 보는
유도탄시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애초 계획으로는 비행시험 후 대통령은 귀경하는 스케줄이었으나 현무의 성공적인 비행시험에 만족해서인지 예정에 없던 다과회가
열렸다. 전대통령은 핵심 연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격려말씀 중에 『지난번 백곰 유도탄은
미제였는데 이번 현무는 진짜 국산 유도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대목이 나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전대통령은 이날 금일봉을
하사했는데, 나는 그 돈으로 국과연 대강당 입구 벽에 우리나라 무기발달사를 보여주는 조형물을 제작해 부착했다. 전대통령의 격려에
고무된 연구원들은 더욱 연구에 몰두했고, 체계실장인 문신행 박사의 노력으로 현무사업은 차질없이 진척됐다. 전대통령의 현무시험
참관 이후 육군은 현무사업에 더욱 관심을 보여 86년 5월3일의 5차 비행시험(최종 DT II)에는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이
참관했고, 다음달 4일의 비행시험(첫 OT I)에는 새로 부임한 이기백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차장, 교육사령관 등을 대동하고
참관했다.
그 날의 시험은 육군 포대요원들이 국과연 연구진에게 운영교육을 받고 처음으로 현무를 발사한 뜻깊은 시험이었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됐다. 이대로 간다면 목표일보다 10개월 빠른 87년 초에는 현무사업이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현무
개발사업은 86년 10월17일 마지막 부대운영 시험을 남겨놓고 있었다. 발사는 현역 군인들이 맡았다. 이번 부대운영시험의 성공은
현무사업의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대운영시험(OT II)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25달러짜리 불량 부품 하나 때문에 오후 1시 정각에 발사된 현무는 구름 한점 없는 가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한 성취감과 아쉬움이 뒤범벅된 묘한 감상에 젖어들던 바로 그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유도탄이
갑자기 정상 탄도에서 왼쪽으로 벗어나 육지를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도조종장치에 이상이 발생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추적
레이더는 내륙으로 향하는 유도탄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고, 방향은 전라북도 변산반도 쪽이었다. 모두 이런 일은 처음 겪는 터라
처음엔 어쩔 줄을 몰라 할 뿐이었다. 백곰시험 중에도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전부 시험안전 구역 내에서 일어난 사고였지
이번처럼 정상 탄도를 벗어나, 그것도 내륙으로 향하는 사고는 아니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유도탄이 시험안전 구역을 벗어나는 순간 공중폭파하도록 문박사에게 지시했다. 문박사가 원격폭파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유도탄은 스크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도탄은 공중폭파시 3부분으로 폭파되도록 설계돼 있다.
그러나 폭파 당시 유도탄의 고도와 속도를 감안할 때 일부는 육지에 떨어졌을 개연성이 컸다. 폭파된 유도탄의 잔해 가운데는
수백kg 되는 것도 있을 터인데 제발 인명이나 재산피해가 없기를 기원했다. 국방부에 사고 경위를 보고하는 한편 전북 부안군
일대에서 유도탄 잔해에 대한 신고가 있었는지를 의뢰했다. 연구원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광학추적장비로 촬영한 필름과 계측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조종장치(roll loop)에 이상이 발생했음이 분명했지만, 이를
확인하려면 조종장치를 회수해야만 했다. 초조감 속에서 유도탄 잔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중에 저녁 6시30분경 마침내
비행기 앞부분 같은 것이 전북 부안군 논바닥에 떨어졌으며, 인명 및 재산피해는 없다는 연락이 왔다. 나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대기중이던 현무 사고조사팀이 당장 달려가 조종장치가 있는 유도탄 앞부분을 회수해왔다.
유도조종실장인 조규필 박사(현 국과연 부장)와 현무체계의 장명진(현 실장)이 사고 조사에 나섰는데, 예상대로 조종장치의 연결 핀
중 하나가 접속불량으로 유도조종 신호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 커넥터는 미 군사규격품으로 FMS를 통해
미국에서 구입한 부품이었다. 유도장치, 추진기관 등 핵심 부품은 유도탄 조립 전에 전수검사를 했지만, 미국에서 구입한 규격품은
미군의 품질검사를 믿고 전수검사 대신 표본검사만 하고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25달러에 불과한 불량부품 하나 때문에 10억원짜리
유도탄을 망친 셈이었다. 미군 군사규격품임을 믿고 전수검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대통령의
참관하에 실시했던 비행시험 때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게 천운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실전배치되는 유도탄의 모든 부품은
전수검사로 바꿔 신뢰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국방부 및 군당국과는 87년 10월까지 향후 1년에 걸쳐 현무의 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설계도를 재검토하는 한편 모든 부품을
전수검사하기로 했다. 또 조기에 완료하기로 했던 현무사업을 다시 수정, 향후 1년에 걸쳐 부대운영시험(OT II)을 두 차례 더
실시한 후 부대배치하기로 결정했다.그 후 체계실장과 연구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군 포대요원들의 협조로 현무체계에 대한 장거리
주행시험과 두 차례에 걸친 부대운영시험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정비유지를 위한 교범 및 부품 등 종합군수지원체계도 차질없이
완료됐다. 현무포대는 마침내 87년 말 예정대로 작전 개시됐다. 나는 두 차례의 부대운영시험은 한미안보회의 및 SDI 조사사업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로써 72년 12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으면서 시작된 나의 유도탄 여정은
15년 만에 대미를 맞게 됐다.
에필로그
89년 5월, 국과연에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기구개편이 있었다. 2개의 연구개발단을 기술분야에 따라 5개 연구개발본부로 편성,
82년 대폭 축소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지난 4년간 부소장 업무 외에 현무 유도탄 개발, 한국형 전차 개발 등 두
개의 주요 사업과 한미 기술협력위원회 등의 일로 건강에 무리가 생겨 부소장직을 벗게 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격무에서 벗어나 그간
읽지 못한 책 속에 묻혀서 재충전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1990년 5월, 나는 소장으로부터 또 한 차례 뜻밖의 지시를
받았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유도탄과 관련된 모든 부품 및 원자재에 대한 수출허가를 취소, 연구소가 수행중인 사업은 물론 다연장
로켓 생산도 중단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방부는 미국에 협상단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는데, 그
협상단을 이끌고 다녀오라는 지시였다.
미국에서 수입해야 할 품목들은 전자부품과 추진제원료 등이었다. 유럽으로 구입선을 바꿀 수도 있지만 시장조사에 따른 사업 지연과
가격 문제가 있었다. 또한 부품 규격이 달라지면 설계도 보완해야 하는 등의 문제도 예상됐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상황을 알아보니 93년에 대덕에서 열리는 엑스포 박람회의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인공위성 발사를 검토한다는 신문보도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을 한층
강화하던 시점이어서 한국의 언론보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방부와 국과연 요원으로 구성된 협상단 7명을 이끌고
6월10일 출장길에 올랐다. 출발 전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한국정부가 과거 미국과 유도탄 개발과 관련해서 합의한 유도탄
사거리와 탄두 중량에 대한 규약을 지킨다는 확신을 보여주기 전에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사전에
이상훈 국방장관에게 두 가지 사항을 건의했다.
첫째는 현무 유도탄이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군사 II급 비밀로 분류된 현무 추진기관의
지상연소시험 및 현무의 비행시험 결과를 한미간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해줄 것, 둘째 미국측이 현무에 대한 현장 확인을 원할
경우 이를 수용하도록 승인해달라는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정도가 아니면 협상은 별무소득이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방부 장관의 결단으로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승인을 받고 출국하게 됐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나와 유도탄의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이었다. 유도탄 사업에서 떠난 지 얼마 안돼 또 이렇게 유도탄과 관련된 문제를 떠안게 되다니…. 정식
회의에 들어가기 앞서 미국 쪽 상황을 알아보니 역시 엑스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보도된 인공위성 발사계획이 문제였다. 차가운
인상의 미 국무부 여성 차관보는 이 내용이 실린 한국의 영자신문을 내밀면서 『미국의 비확산 대상은 군용 유도무기뿐 아니라 민간의
비행체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몇몇 연구기관에서 실행하지도 못할 황당한 계획을 멋대로 신문에 발표해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결론만 얘기하면, 우리 일행은 결국 미국의 유도탄 부품 수출을 재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과정에 국방장관에게서 특별 허가를 받아온 현무 유도탄에 대한 기술 설명과 미국측 검사요원의 현무 생산현장 확인을 보장해준다는 두
가지 카드를 다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수모를 겪은 것은 자주기술이 없기 때문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자리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지난 일들을 반추했다. 72년 12월27일 박대통령의 청천벽력 같은 장거리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정권의 부침과 더불어 영광과
오욕을 오간 나날들….북한은 비록 우리보다 늦게 유도탄 개발에 착수했지만, 꾸준한 사업 추진으로 지금은 동북아는 물론 멀리
미국의 안보까지 위협할 정도가 됐다. 물론 이런 무모하고 도전적인 북한의 군사정책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 우리는 어땠는가.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유도탄 개발사업이 한 정권의 판단 실수로 엄청난 차질을
빚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현대무기체계의 핵심인 유도무기 연구·개발이 어떤 이유로도 중단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完>
1. 흔히 조선군은 이순신 형님의 함대와 의병 빼면 다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초반에 조정의 내분과 전쟁준비의
미흡, 그리고 전쟁시 안이한 대처와 올바르지 못한 병력 운영등의 악재가 계~속 겹처서 초반에 엄청 관광당했던 것 뿐. 전쟁 시작후 1년간
펼쳐졌던 17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승리는 단 3회뿐이었음.
2. 조선군의 임진왜란 첫 승리가 옥포해전이라고 아시는 분이 많은데,
조선군의 첫 승리는 '신각' 이라는 명장이 이뤄냈음.(그러나 칭찬받기는 커녕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처형당함.ㄱ-
선조가 돌+아이 왕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부분)
3. 전쟁 초 일본군은 함경도까지 진격했었다가 다시 도망치듯 후퇴했는데,
조선 특유의 굴곡 많은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북방의 군대가 너무 강력했던 것이 진짜 이유. 북방에 포진된 군대는 항상 여진족이니
뭐니해서 전쟁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실전감각이 최상이었음. 실제로 일본군이 북방의 한 마을에서 쌀 창고를 털다가, 무려 그 마을의
'주민' 들에게 박살나고(...) 부리나케 후퇴한 사례가 있었음.
4.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시작후
2년동안 총 18회의 전투가 있었는데, 일본의 선공 8회, 조선의 선공은 10회(이중 3회는 명군과의 연합작전)였음. 전적은 7대11로(명과의
연합작전 3회는 모두 승리함)조선이 우위에 있었지만 사실은 더욱 많이 이길수 있었는데, 돌+아이 왕인 선조가 의병장들을 말도 안돼는 이유로
귀향보내거나 처형시키는 등 토사구팽해버렸기때문에 조선군의 주요한 전력인 의병의 힘이 엄청 약해졌었기 때문에 진 횟수가 좀 더 늘어나게
됨.
5.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우리에게 많이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사실 명은 조승훈 - 이여송으로
이어지는 무뇌 사령관 2단 콤보로 인해 전~혀 도움이 안됬음. 특히 이여송 장군이 일본군의 너무나도 뻔한 유인 작전에 그대로 걸려버려 완전
개박살 나버린 '벽제관 전투' 는 명이 했던 삽질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힘.
6. 물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호하여 조선의 전투 능력을 계속해서 유지시킬 수 있게 해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해야 마땅하지만, 사실 해안 영역의 주도권을 지킨건
전라도에 한해서였지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로 이어지는 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음. 그리고 보급로를 모조리 끊어놨다고 잘못 아시는 분이 많은데
본토 - 부산 - 동해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여전히 살아있었음. 즉, 일본군의 패배 이유가 보급로 차단으로 인한 전투력 저하는 아니라는
것.
7. 보급로는 있었지만 일본군의 식량난은 굉장히 심각했음. 그도 그럴 것이,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은 영남지역의 농민들이 전원
피난을 가버렸기 때문. 그래서 전쟁기간 7년중 3년이 풍년이었는데도 일본군은 늘 본토에 식량 부족을 호소했었음. (조선은 이순신의 수군이
보호하고 있던 전라도 곡창지대 덕에 그나마 나았음) 뿐만 아니라 조선의 관군이나 의병들이 전투에서 패해 후퇴할시에 자신의 식량창고와 무기고를
모두 불질러버리는 등의 전략을 사용했기때문에(불멸의 이순신 참고)약탈을 통한 이득도 별로 없었음.(대표적인 사례는 남원성. 남원성은 조창이 있던
도시라 굉장한 식량이 쌓여있었는데, 성이 함락될 것을 직감한 관군들이 이 많은 식량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도망갔었음)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해프닝도 있었는데, 어느 지역에서 조선군와 일본군이 대치하던 중이었는데, 일본쪽은 식량난이 상당히 심한 상황이었음. 결국 일본군은 사자를 보내
'식량만 주면 항복하겠다.' 라고 했는데, 마침 대치하던 조선군도 식량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배고프다. 그냥 싸우자.' 라고 대답했다고 함.(...) 실제로 굶주림, 추위등의 이유로 항복을 선언한
일본군이 무려 1만에 달했다고 함.
8. 일본군이 임진왜란시에 보낸 선발대의 수는 28만 6천, 정유재란시에 합류한 추가병력의 수는
13만 7천, 그리고 본토의 나고야에서는 10만의 병력이 대기중이었음. 즉 임진왜란시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의 수는 50만이 넘었는데, 이런
엄청난 병력을 쏟아부었는데도 진걸 보면 일본이 조선에게 얼마나 관광당했는지를 알 수 있음.(물론 조선도 피해가 적은 건
아니었지만...)
9. 고니시 유키나가와 더불어 조선을 가장 먼저 침략한 약 30만의 선발대를 이끌던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을
점령한 후 더욱 날뛰기 시작하며 함경도를 지나 만주까지 진출하는 만용을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살던 여진족에게 신나게 얻어맞고
부리나케 도망감. 그러나 비극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음. 조선으로 도망을 간 일본군과 그런 일본군을 추격하던 여진족은 일본군의 만행에 화가 단단히
나있던 조선 의병에게 둘 다 격퇴당함.(...) 여진족과 조선 의병에게 정신없이 깨진 가토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경상도까지 도망감. 이후 어디 다닐때 자기먹을 도시락을 꼭싸서다니고,(도망칠때를 대비해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함경도에서
포위공격당하던 공포를 못잊어서 자신의 성에 우물을 수십개를 파고 엄청난 양의 식량을 비축해둿다는 이야기가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
[결론]
-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감옥에 넣어버리고, 나라를 위해 싸운 장군들과 의병장들을 말도 안돼는 이유로 죽이거나
귀양보낸 선조는 누가 뭐래도 돌+아이 왕.
-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틀어 펼쳐진 105회의 전투에서 조선군의 승리는
65회(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모두 제외한 수치. 관군 단독 승리는 38회, 의병 단독 승리는 10회, 합동 작전에 의한 승리는 17회)임진왜란의
승리는 수군과 의병들만이 활약한게 아니라, 관군들 역시 최선을 다해서 싸웠기에 이뤄낸 승리.
- 사실 임진왜란은 명의 도움 없이도
조선이 충분히 무난하게 승리할 수 있었고, 전쟁 기간도 길 이유가 없었음. 전쟁이 7년으로 길어진 것도, 수 많은 죄 없는 병사들과 백성들이
무참히 죽어나간 것도 돌+아이 왕인 선조와 무능한 대신들의 바보같은 삽질로 인해 초반에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음.
1. 전쟁준비의 미흡... 이라기 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정확한 전쟁의 규모"의 예상을 못했던 거라고 봐야 합니다.
조선조정은 여러 첩보를 통해서 이미 전쟁의 조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 규모를 예상하지 못한거죠.
당시의 지리적 조건(?)등이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서... (조선에게 관심사는 중국...명이었지 듣보잡
일본이 아니었던 관계로...)
실제 당시 조선은 일본을 조선보다 작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또한 조선을 일본보다 큰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조선 조정은 일본이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면 끽해야 3~5만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고 거의 그정도 수준에 맞는 대비를 하고
있었다가 당한겁니다. 한마디로 고려말기에 왜구 수준일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다가 당한거...-ㄴ_-;
2.3. 북방의
군대는 조선군대 내에서 유일하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죠. 실제로 조선은 여진에 대한 수비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여진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했습니다. 보통 4군 6진만 개척하고 수비만 한걸로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 회유와 선제공격으로 여진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킴으로서 국경의 안정을 이뤄냅니다.
5. 명의 삽질은 유명하지요. 게다가 명군의 가장 치명적 실수는... 보급을
거의 안챙겨왔다는거... 수군으로 필수 보급은 해결하긴 했지만 당시 명의 정치 상황으로 볼때 명군의 해외 원정을 명조정이 감당할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조선조정에 상당한 압박과 깽판을 쳤고 그덕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죠. 명군 식량마련해 주느라... -ㄴ_-
6. 7.
일본 본토-부산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유지되긴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일본군을 상륙시키다보니...
당시 일본 함대로는 감당
불가...
에초에 일본은 일본식으로 성주 대가지 짜르면 나머진 알아서 복종할꺼라고 생각해서 에초에 보급자체를 거의 신경안씀...
초반 일본수군은 식량보급목적보다는 병력수송에 집중했고 이후에는 식량수송은 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상륙군을 보내놓은 까닭에 일본에서의
식량 보급은 그야말로 택도 없는 수준... 그나마 일본내에서의 조선으로 보낼 식량 확보 자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알고
있음. 조선
파병군 차제가 히데요시 파벌들이 주축이었고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은 파병 및 지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그렇게
축척한 병력과 물자로 히데요시 파에게 도전함.
게다가 이순신의 수군을 견제할만큼의 수군, 즉 동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할만큼의 배를 남겨둬야
했기에 배가 있다고 전부 쌀 실어나를수도 없었던...
어쨌던 적에 손에 넘어가기 전에 없앤다...라는건 적어도 군사들이 최소한의
개념(?)은 있단소리...-ㄴ_-;;;;;;
전쟁 초기 부산진을 전부 태워버린것도 조선군이 조직적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긴함...-ㄴ_-;;;;
7. "항왜" 라고 부르는...항복한 왜군들이 이순신장군 휘하에만 최소 만명이 넘는데... 항왜를 다룬
여러가지 자료(특히 역사스페셜)를 보면 전쟁 극초반에 투항한 일본군도 다수였고 이후 특히나 굶주림에 왜군 병사들이 상당수 조선군으로
항복하고...항복을 넘어서 같이 싸우기까지 하는 항왜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함... 관군의 큰 집단엔 항왜들로만 조직된 항왜부대들도 조직됨.
(주로 조총부대)
실제 임진왜란 후 선조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조선인이 된...중고위 일본 장수들이 상당수... (실록에 나옴. 정확한
숫자는 밑에분에게...)
특히나 유명한 인물로 "사야가 김충선"이 있음. 이 사람은 전쟁 초기 조선 망명을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옴.
김충선은 실제로 투항후 조총부대를 조직하고 조총의 설계에 대해서 이순신장군에게 자문함. 그리고 권율과 같이 싸움.
전후
대구 우륵동에 정착 "모하당 문집" 같은것도 내고...완전 조선인으로 귀화해 살다 감. 김충선 후손들이 실제함.
사야가 김충선은 특히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함.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책과 다큐(nhk) 그리고 사야가가 누군지 밣히고자 하는 향토사학자 들도 있음. (고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이란 책이 김충선을 주인공으로 쓴 책. 역사적 재미(?)는 있지만 소설 자체로는 그닥...)
8. 나고야
10만 병력이 조선 파병을 위한 병력이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
그 병력은 전쟁이 일본예상대로 풀렸을경우 상륙에서 조선을 거점화할
병력이었다는건 맞지만...
실제 그 병력은 히데요시의 일본내 장악을 위한 일본내부 반란진압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봄.
9. 이건 유명한 일화죠. 전쟁후 일본으로 돌아온 고니시가 전쟁에서의 굶주림에 대한 기억때문에 다다미를 삶아서 먹을수 있는걸로
짰다던가 다다미 아래에 고구마를 잔뜩 심었다던가...
결론
선조가 돌i 였다는거에 완전 동의하지는 않음. 단지 시대에
맞지 않는 왕으로서 의심병이 너무 도졌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그런식으로 따지면 원의 침략에 수도 버리고 백성버리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세금은 세금대로 걷어서 사치부린 고려조정은 쌩싸이코
집단에 전세계 역사상 수많은 왕들이 전부 돌i임.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의병의 공로를 크게 부각시킨건 일종의 조선까역사관(?)에서 비롯된거. 식민사학계열과 거기에 물든 대한민국의 일종의 "자기부정" 형식으로 "조선이
못나서 망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일제치하도 없었을텐데...."라는 식의 조선까이자 자기부정...
에초에 조선조정은 전쟁 중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조정의 행정력에는 변함이 없었음. 그랬으니 500년이나 버틴거...
명의 참전 자체가 전쟁을 길게 끌었다는거엔 동의.
명이 전쟁을 길게 끈 이유는 에초에 명 조정이 망할조짐이 들어서 원정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도 능력도 안된데다가 명 조정은 조선의 사정에
관심이 없었음. 단지 싸우긴 싫고 빨리 전쟁 끝내겠다는 의지로 일본에 현재 전선대로 국경을 유지하겠다는둥 하는 정전문서 보내는등 성의를
안보임. 게다가 명은 임란 전까지 조선내부 사정을 거의 몰랐음.
참전하고 나서야 조선내부 사정을 알고 참견하기 시작했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조선의 약화를 부추긴 감도 있음.
"제도가 도입되면 진급적기 경과 후 2년마다 계급별로 전체 장교의 30%가 정년보장 심사제도의 대상이 될 것"이라며
"근무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인원들이 퇴출 대상이 될 것"
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모두 전투병과로만 임관시키고 1∼2년 복무하고 나서 원하는 병과로 전과하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GP소대장은 단기복무자가 아닌 장기복무 희망자 또는 장기복무자 중 소대장 경험이 있는 중위급으로 보직하고
GP소대의 교대 주기를 현재 3개월에서 1∼2개월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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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진급에 목매는 인간들 더 심하게 되는것도 되는거지만.. 누구 말처럼 아부하고 비비는데만 신경쓸듯 -_-
그리고 1~2년 복무 후면 죄 중위일텐데 대위쯤 돼야 쓸모있겠네? -_-
더구나 교대 주기 1~2개월... 지형숙지하고 끝나겠군.. 누구냐? 이거 낸사람.
1. 급여 : 부사관의 경우 일반공무원에 비해 약함(시간외 수당에서 차이가 많음), 장교는 일반공무원보다 조금 많음.
2. 직업의 안정성
예전에는 부사관 근무시 대다수 상사까지 진급 가능(53세 정년)했으나 요즘은 사회의 취업난으로인해
장기근무(10년이상) 신청자가 많아 상사진급은 고사하고 장기복무신청에도 경쟁이 치열함. 원사진급시 55세 정년.
장교의 경우 정년은 나이정년과 계급정년중 먼저 도달하는 것에의해 정년이 설정되며 통상
계급정년이 먼저 해당됨. 임관후 11년내 소령진급 못할시 37세 가량에 동기생들과 함께 전역되며,
소령진급후 42세가량 이전에 중령진급 못할시 45세에 전역, 중령진급시 53세 정년.
국가공무원법 개정으로 일반/기능직, 경찰, 소방공무원은 60세 정년..
전역후 취업시 혜택? 전혀 없슴.(통상 자영업, 보험업).
3. 근무환경
군 인의 2/3는 파주-포천-가평-춘천-양구-인제-속초를 연하여 북방의 격오지/산골, 해안에 근무하며,
특히 장교의 경우 2~3년주기로 보직이동되어 40세가량 이상되면 자녀교육상 월1~2회가량 가족상봉함.
가족과 별거안하는 경우 잦은 전학으로인해 자녀들은 친구가 없고
정서불안, 잦은 환경변화에 따른 집중력 부족등으로 낙오되는 경우가 많음.
잦은이사와 비상사태시 신속한 소집등을 위해 부대주변에 군인관사가 있으나 육군의 80%이상이 15~23평.
4. 종합의견
댓글들 중에 간부를 비하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아마 열악한 근무환경/조건,
군조직의 특수성..등등에 대한 기억때문에 더욱 비판적일 것입니다.
위 에 나열한 복무기간중 급여는 적당한듯 합니다. 그러나 직업의 안정성, 근무환경, 자녀교육여건등은
이루 말할수 없을만큼 열악합니다.
저의 경우 군복무중 결혼할때 4일간의 휴가를 받아 신혼여행은 1박2일후 복귀했고,
첫아이를 서울에서 출산했는데 서울집에 갈수가 없어서 1달후에 친구녀석이 아내와 아이를 대려주고 갔던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격오지에서 묵묵히 근무하는 간부들이 대부분이나, 아직도 일부 간부들에의해 비난받을 일들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정화되었고, 많이노력하고 있는듯 합니다.
이런 여건에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자기식구를 감싸주고 보호하는 당근보다는
채찍만 휘두르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네요..간부들이 전역후 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안티국방이 되도록 하네요......정말 밉습니다......5년전 전역한 노병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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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HDD는 그 유래와 기능적 특성상, 컴퓨터 시스템 안에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동식 미디어로 사용할 때에는 HDD의 특징상 충격에 아주 민감하기에, 쉽게 고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Transcend StoreJet 25 mobile 제품군은 트랜샌드의 발전된 충격 방지 기술을 사용하여, 안정성과 신뢰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 증거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U.S.military drop-test standards Passed, 즉 미군 공식 충격 테스트 실험을 패스했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제품은 MIL-STD-810F, Method 516.5, Procedure IV 규격에 합격되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 실험은, 미국에서 군사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한 내 충격성을 테스트하는 항목으로서, 이 규격을 패스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따른다.
1. 45.4kg 미만의 물체일 것
2. 면적이 91Cm를 넘지 않을 것
3. 위 조건에서 지면에서 122Cm 떨어진 곳에서 자유 낙하 시킬 것
4. 3번을 26회 반복할 것.
5. 전원을 인가하여 정상 작동할 것
이상이MIL-STD-810F, Method 516.5, Procedure IV 규격에 대한 설명이다.
일반 2.5인치 하드는 비 작동 시 900Gs, 작동 시 300~350Gs 정도의 강도를 지닌 것에 반해
MIL-STD-810F – Transit Drop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군은 비 작동 시 20000Gs, 작동 시 1200 Gs의 내구성을 가진 것으로 표기된다.
이와 같은 고도의 내 충격성을 가진 제품으로서는 파나소닉의 터프북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내 충격성은, 일반적인 환경에서 충격에 의한 데이터 소실을 방지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내 충격성을 보장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조정은 여러 첩보를 통해서 이미 전쟁의 조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 규모를 예상하지 못한거죠.
당시의 지리적 조건(?)등이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서... (조선에게 관심사는 중국...명이었지 듣보잡 일본이 아니었던 관계로...)
실제 당시 조선은 일본을 조선보다 작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또한 조선을 일본보다 큰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조선 조정은 일본이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면 끽해야 3~5만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고 거의 그정도 수준에 맞는 대비를 하고 있었다가 당한겁니다. 한마디로 고려말기에 왜구 수준일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다가 당한거...-ㄴ_-;
2.3. 북방의 군대는 조선군대 내에서 유일하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죠. 실제로 조선은 여진에 대한 수비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여진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했습니다. 보통 4군 6진만 개척하고 수비만 한걸로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 회유와 선제공격으로 여진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킴으로서 국경의 안정을 이뤄냅니다.
5. 명의 삽질은 유명하지요. 게다가 명군의 가장 치명적 실수는... 보급을 거의 안챙겨왔다는거... 수군으로 필수 보급은 해결하긴 했지만 당시 명의 정치 상황으로 볼때 명군의 해외 원정을 명조정이 감당할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조선조정에 상당한 압박과 깽판을 쳤고 그덕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죠. 명군 식량마련해 주느라... -ㄴ_-
6. 7. 일본 본토-부산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유지되긴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일본군을 상륙시키다보니...
당시 일본 함대로는 감당 불가...
에초에 일본은 일본식으로 성주 대가지 짜르면 나머진 알아서 복종할꺼라고 생각해서 에초에 보급자체를 거의 신경안씀...
초반 일본수군은 식량보급목적보다는 병력수송에 집중했고 이후에는 식량수송은 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상륙군을 보내놓은 까닭에 일본에서의 식량 보급은 그야말로 택도 없는 수준... 그나마 일본내에서의 조선으로 보낼 식량 확보 자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알고
있음. 조선 파병군 차제가 히데요시 파벌들이 주축이었고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은 파병 및 지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그렇게 축척한 병력과 물자로 히데요시 파에게 도전함.
게다가 이순신의 수군을 견제할만큼의 수군, 즉 동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할만큼의 배를 남겨둬야 했기에 배가 있다고 전부 쌀 실어나를수도 없었던...
어쨌던 적에 손에 넘어가기 전에 없앤다...라는건 적어도 군사들이 최소한의 개념(?)은 있단소리...-ㄴ_-;;;;;;
전쟁 초기 부산진을 전부 태워버린것도 조선군이 조직적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긴함...-ㄴ_-;;;;
7. "항왜" 라고 부르는...항복한 왜군들이 이순신장군 휘하에만 최소 만명이 넘는데... 항왜를 다룬 여러가지 자료(특히 역사스페셜)를 보면 전쟁 극초반에 투항한 일본군도 다수였고 이후 특히나 굶주림에 왜군 병사들이 상당수 조선군으로 항복하고...항복을 넘어서 같이 싸우기까지 하는 항왜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함... 관군의 큰 집단엔 항왜들로만 조직된 항왜부대들도 조직됨. (주로 조총부대)
실제 임진왜란 후 선조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조선인이 된...중고위 일본 장수들이 상당수... (실록에 나옴. 정확한 숫자는 밑에분에게...)
특히나 유명한 인물로 "사야가 김충선"이 있음. 이 사람은 전쟁 초기 조선 망명을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옴.
김충선은 실제로 투항후 조총부대를 조직하고 조총의 설계에 대해서 이순신장군에게 자문함. 그리고 권율과 같이 싸움.
전후 대구 우륵동에 정착 "모하당 문집" 같은것도 내고...완전 조선인으로 귀화해 살다 감. 김충선 후손들이 실제함.
사야가 김충선은 특히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함.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책과 다큐(nhk) 그리고 사야가가 누군지 밣히고자 하는 향토사학자 들도 있음. (고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이란 책이 김충선을 주인공으로 쓴 책. 역사적 재미(?)는 있지만 소설 자체로는 그닥...)
8. 나고야 10만 병력이 조선 파병을 위한 병력이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
그 병력은 전쟁이 일본예상대로 풀렸을경우 상륙에서 조선을 거점화할 병력이었다는건 맞지만...
실제 그 병력은 히데요시의 일본내 장악을 위한 일본내부 반란진압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봄.
9. 이건 유명한 일화죠. 전쟁후 일본으로 돌아온 고니시가 전쟁에서의 굶주림에 대한 기억때문에 다다미를 삶아서 먹을수 있는걸로 짰다던가 다다미 아래에 고구마를 잔뜩 심었다던가...
결론
선조가 돌i 였다는거에 완전 동의하지는 않음. 단지 시대에 맞지 않는 왕으로서 의심병이 너무 도졌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그런식으로 따지면 원의 침략에 수도 버리고 백성버리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세금은 세금대로 걷어서 사치부린 고려조정은 쌩싸이코
집단에 전세계 역사상 수많은 왕들이 전부 돌i임.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의병의 공로를 크게 부각시킨건 일종의 조선까역사관(?)에서 비롯된거. 식민사학계열과 거기에 물든 대한민국의 일종의 "자기부정" 형식으로 "조선이 못나서 망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일제치하도 없었을텐데...."라는 식의 조선까이자 자기부정...
에초에 조선조정은 전쟁 중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조정의 행정력에는 변함이 없었음. 그랬으니 500년이나 버틴거...
명의 참전 자체가 전쟁을 길게 끌었다는거엔 동의.
명이 전쟁을 길게 끈 이유는 에초에 명 조정이 망할조짐이 들어서 원정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도 능력도 안된데다가 명 조정은 조선의 사정에 관심이 없었음. 단지 싸우긴 싫고 빨리 전쟁 끝내겠다는 의지로 일본에 현재 전선대로 국경을 유지하겠다는둥 하는 정전문서 보내는등 성의를 안보임. 게다가 명은 임란 전까지 조선내부 사정을 거의 몰랐음.
참전하고 나서야 조선내부 사정을 알고 참견하기 시작했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조선의 약화를 부추긴 감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