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 조선군은 이순신 형님의 함대와 의병 빼면 다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초반에 조정의 내분과 전쟁준비의
미흡, 그리고 전쟁시 안이한 대처와 올바르지 못한 병력 운영등의 악재가 계~속 겹처서 초반에 엄청 관광당했던 것 뿐. 전쟁 시작후 1년간
펼쳐졌던 17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승리는 단 3회뿐이었음.
2. 조선군의 임진왜란 첫 승리가 옥포해전이라고 아시는 분이 많은데,
조선군의 첫 승리는 '신각' 이라는 명장이 이뤄냈음.(그러나 칭찬받기는 커녕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처형당함.ㄱ-
선조가 돌+아이 왕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부분)
3. 전쟁 초 일본군은 함경도까지 진격했었다가 다시 도망치듯 후퇴했는데,
조선 특유의 굴곡 많은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북방의 군대가 너무 강력했던 것이 진짜 이유. 북방에 포진된 군대는 항상 여진족이니
뭐니해서 전쟁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실전감각이 최상이었음. 실제로 일본군이 북방의 한 마을에서 쌀 창고를 털다가, 무려 그 마을의
'주민' 들에게 박살나고(...) 부리나케 후퇴한 사례가 있었음.
4.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시작후
2년동안 총 18회의 전투가 있었는데, 일본의 선공 8회, 조선의 선공은 10회(이중 3회는 명군과의 연합작전)였음. 전적은 7대11로(명과의
연합작전 3회는 모두 승리함)조선이 우위에 있었지만 사실은 더욱 많이 이길수 있었는데, 돌+아이 왕인 선조가 의병장들을 말도 안돼는 이유로
귀향보내거나 처형시키는 등 토사구팽해버렸기때문에 조선군의 주요한 전력인 의병의 힘이 엄청 약해졌었기 때문에 진 횟수가 좀 더 늘어나게
됨.
5.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우리에게 많이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사실 명은 조승훈 - 이여송으로
이어지는 무뇌 사령관 2단 콤보로 인해 전~혀 도움이 안됬음. 특히 이여송 장군이 일본군의 너무나도 뻔한 유인 작전에 그대로 걸려버려 완전
개박살 나버린 '벽제관 전투' 는 명이 했던 삽질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힘.
6. 물론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호하여 조선의 전투 능력을 계속해서 유지시킬 수 있게 해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해야 마땅하지만, 사실 해안 영역의 주도권을 지킨건
전라도에 한해서였지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로 이어지는 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음. 그리고 보급로를 모조리 끊어놨다고 잘못 아시는 분이 많은데
본토 - 부산 - 동해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여전히 살아있었음. 즉, 일본군의 패배 이유가 보급로 차단으로 인한 전투력 저하는 아니라는
것.
7. 보급로는 있었지만 일본군의 식량난은 굉장히 심각했음. 그도 그럴 것이,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은 영남지역의 농민들이 전원
피난을 가버렸기 때문. 그래서 전쟁기간 7년중 3년이 풍년이었는데도 일본군은 늘 본토에 식량 부족을 호소했었음. (조선은 이순신의 수군이
보호하고 있던 전라도 곡창지대 덕에 그나마 나았음) 뿐만 아니라 조선의 관군이나 의병들이 전투에서 패해 후퇴할시에 자신의 식량창고와 무기고를
모두 불질러버리는 등의 전략을 사용했기때문에(불멸의 이순신 참고)약탈을 통한 이득도 별로 없었음.(대표적인 사례는 남원성. 남원성은 조창이 있던
도시라 굉장한 식량이 쌓여있었는데, 성이 함락될 것을 직감한 관군들이 이 많은 식량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도망갔었음)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해프닝도 있었는데, 어느 지역에서 조선군와 일본군이 대치하던 중이었는데, 일본쪽은 식량난이 상당히 심한 상황이었음. 결국 일본군은 사자를 보내
'식량만 주면 항복하겠다.' 라고 했는데, 마침 대치하던 조선군도 식량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배고프다. 그냥 싸우자.' 라고 대답했다고 함.(...) 실제로 굶주림, 추위등의 이유로 항복을 선언한
일본군이 무려 1만에 달했다고 함.
8. 일본군이 임진왜란시에 보낸 선발대의 수는 28만 6천, 정유재란시에 합류한 추가병력의 수는
13만 7천, 그리고 본토의 나고야에서는 10만의 병력이 대기중이었음. 즉 임진왜란시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의 수는 50만이 넘었는데, 이런
엄청난 병력을 쏟아부었는데도 진걸 보면 일본이 조선에게 얼마나 관광당했는지를 알 수 있음.(물론 조선도 피해가 적은 건
아니었지만...)
9. 고니시 유키나가와 더불어 조선을 가장 먼저 침략한 약 30만의 선발대를 이끌던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을
점령한 후 더욱 날뛰기 시작하며 함경도를 지나 만주까지 진출하는 만용을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살던 여진족에게 신나게 얻어맞고
부리나케 도망감. 그러나 비극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음. 조선으로 도망을 간 일본군과 그런 일본군을 추격하던 여진족은 일본군의 만행에 화가 단단히
나있던 조선 의병에게 둘 다 격퇴당함.(...) 여진족과 조선 의병에게 정신없이 깨진 가토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경상도까지 도망감. 이후 어디 다닐때 자기먹을 도시락을 꼭싸서다니고,(도망칠때를 대비해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함경도에서
포위공격당하던 공포를 못잊어서 자신의 성에 우물을 수십개를 파고 엄청난 양의 식량을 비축해둿다는 이야기가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음.
[결론]
-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감옥에 넣어버리고, 나라를 위해 싸운 장군들과 의병장들을 말도 안돼는 이유로 죽이거나
귀양보낸 선조는 누가 뭐래도 돌+아이 왕.
-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틀어 펼쳐진 105회의 전투에서 조선군의 승리는
65회(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모두 제외한 수치. 관군 단독 승리는 38회, 의병 단독 승리는 10회, 합동 작전에 의한 승리는 17회)임진왜란의
승리는 수군과 의병들만이 활약한게 아니라, 관군들 역시 최선을 다해서 싸웠기에 이뤄낸 승리.
- 사실 임진왜란은 명의 도움 없이도
조선이 충분히 무난하게 승리할 수 있었고, 전쟁 기간도 길 이유가 없었음. 전쟁이 7년으로 길어진 것도, 수 많은 죄 없는 병사들과 백성들이
무참히 죽어나간 것도 돌+아이 왕인 선조와 무능한 대신들의 바보같은 삽질로 인해 초반에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음.
자료참고 - http://blog.naver.com/jbdomin/100050005281
스크랩 북/밀리터리2009. 1. 6. 00:19
조선조정은 여러 첩보를 통해서 이미 전쟁의 조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 규모를 예상하지 못한거죠.
당시의 지리적 조건(?)등이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서... (조선에게 관심사는 중국...명이었지 듣보잡 일본이 아니었던 관계로...)
실제 당시 조선은 일본을 조선보다 작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또한 조선을 일본보다 큰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조선 조정은 일본이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면 끽해야 3~5만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고 거의 그정도 수준에 맞는 대비를 하고 있었다가 당한겁니다. 한마디로 고려말기에 왜구 수준일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다가 당한거...-ㄴ_-;
2.3. 북방의 군대는 조선군대 내에서 유일하게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죠. 실제로 조선은 여진에 대한 수비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여진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했습니다. 보통 4군 6진만 개척하고 수비만 한걸로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 회유와 선제공격으로 여진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킴으로서 국경의 안정을 이뤄냅니다.
5. 명의 삽질은 유명하지요. 게다가 명군의 가장 치명적 실수는... 보급을 거의 안챙겨왔다는거... 수군으로 필수 보급은 해결하긴 했지만 당시 명의 정치 상황으로 볼때 명군의 해외 원정을 명조정이 감당할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조선조정에 상당한 압박과 깽판을 쳤고 그덕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죠. 명군 식량마련해 주느라... -ㄴ_-
6. 7. 일본 본토-부산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유지되긴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일본군을 상륙시키다보니...
당시 일본 함대로는 감당 불가...
에초에 일본은 일본식으로 성주 대가지 짜르면 나머진 알아서 복종할꺼라고 생각해서 에초에 보급자체를 거의 신경안씀...
초반 일본수군은 식량보급목적보다는 병력수송에 집중했고 이후에는 식량수송은 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상륙군을 보내놓은 까닭에 일본에서의 식량 보급은 그야말로 택도 없는 수준... 그나마 일본내에서의 조선으로 보낼 식량 확보 자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알고
있음. 조선 파병군 차제가 히데요시 파벌들이 주축이었고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은 파병 및 지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그렇게 축척한 병력과 물자로 히데요시 파에게 도전함.
게다가 이순신의 수군을 견제할만큼의 수군, 즉 동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할만큼의 배를 남겨둬야 했기에 배가 있다고 전부 쌀 실어나를수도 없었던...
어쨌던 적에 손에 넘어가기 전에 없앤다...라는건 적어도 군사들이 최소한의 개념(?)은 있단소리...-ㄴ_-;;;;;;
전쟁 초기 부산진을 전부 태워버린것도 조선군이 조직적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긴함...-ㄴ_-;;;;
7. "항왜" 라고 부르는...항복한 왜군들이 이순신장군 휘하에만 최소 만명이 넘는데... 항왜를 다룬 여러가지 자료(특히 역사스페셜)를 보면 전쟁 극초반에 투항한 일본군도 다수였고 이후 특히나 굶주림에 왜군 병사들이 상당수 조선군으로 항복하고...항복을 넘어서 같이 싸우기까지 하는 항왜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함... 관군의 큰 집단엔 항왜들로만 조직된 항왜부대들도 조직됨. (주로 조총부대)
실제 임진왜란 후 선조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조선인이 된...중고위 일본 장수들이 상당수... (실록에 나옴. 정확한 숫자는 밑에분에게...)
특히나 유명한 인물로 "사야가 김충선"이 있음. 이 사람은 전쟁 초기 조선 망명을 목적으로 조선에 건너옴.
김충선은 실제로 투항후 조총부대를 조직하고 조총의 설계에 대해서 이순신장군에게 자문함. 그리고 권율과 같이 싸움.
전후 대구 우륵동에 정착 "모하당 문집" 같은것도 내고...완전 조선인으로 귀화해 살다 감. 김충선 후손들이 실제함.
사야가 김충선은 특히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함.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책과 다큐(nhk) 그리고 사야가가 누군지 밣히고자 하는 향토사학자 들도 있음. (고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이란 책이 김충선을 주인공으로 쓴 책. 역사적 재미(?)는 있지만 소설 자체로는 그닥...)
8. 나고야 10만 병력이 조선 파병을 위한 병력이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
그 병력은 전쟁이 일본예상대로 풀렸을경우 상륙에서 조선을 거점화할 병력이었다는건 맞지만...
실제 그 병력은 히데요시의 일본내 장악을 위한 일본내부 반란진압용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봄.
9. 이건 유명한 일화죠. 전쟁후 일본으로 돌아온 고니시가 전쟁에서의 굶주림에 대한 기억때문에 다다미를 삶아서 먹을수 있는걸로 짰다던가 다다미 아래에 고구마를 잔뜩 심었다던가...
결론
선조가 돌i 였다는거에 완전 동의하지는 않음. 단지 시대에 맞지 않는 왕으로서 의심병이 너무 도졌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그런식으로 따지면 원의 침략에 수도 버리고 백성버리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세금은 세금대로 걷어서 사치부린 고려조정은 쌩싸이코
집단에 전세계 역사상 수많은 왕들이 전부 돌i임.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의병의 공로를 크게 부각시킨건 일종의 조선까역사관(?)에서 비롯된거. 식민사학계열과 거기에 물든 대한민국의 일종의 "자기부정" 형식으로 "조선이 못나서 망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일제치하도 없었을텐데...."라는 식의 조선까이자 자기부정...
에초에 조선조정은 전쟁 중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조정의 행정력에는 변함이 없었음. 그랬으니 500년이나 버틴거...
명의 참전 자체가 전쟁을 길게 끌었다는거엔 동의.
명이 전쟁을 길게 끈 이유는 에초에 명 조정이 망할조짐이 들어서 원정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도 능력도 안된데다가 명 조정은 조선의 사정에 관심이 없었음. 단지 싸우긴 싫고 빨리 전쟁 끝내겠다는 의지로 일본에 현재 전선대로 국경을 유지하겠다는둥 하는 정전문서 보내는등 성의를 안보임. 게다가 명은 임란 전까지 조선내부 사정을 거의 몰랐음.
참전하고 나서야 조선내부 사정을 알고 참견하기 시작했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조선의 약화를 부추긴 감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