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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당시의 정교하고도 웅장한 참호 시스템)
제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서 서부전선으로 배송된 식량의 양은 무려 324만톤에 달했습니다. 324만톤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난 양인 것만은 확실하지요. 덕분에 대전 초기, 영국군의 급식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1인당 하루 배급량은 빵과 건빵 외에도, 280그램의 고기와 230그램의 채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채소보다 고기의 공급량이 많은 것을 보면 정말 영국인답지요 ? ( 영국인은 하루에 네끼를 먹었다 http://blog.daum.net/nasica/5561033 참조 ) 이 당시 영국군의 주된 식량은 bully라고 불렸던 소금에 절인 쇠고기 깡통과 빵(또는 건빵)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나폴레옹 전쟁 때 스페인 전장에서 싸우던 영국군 병사가 배급받던 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의 입맛은 참 꾸준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지... 다만 쇠고기가 중대 단위로 커다란 나무통에 넣어져 배급되지 않고 한끼용 깡통으로 포장되어 대량 배포되었다는 것만 차이가 나는군요. 참고로, 양철 깡통이 발명된 것은 1820년대인데, 영국군이 정식으로 '깡통 야전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의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 때였다고 하니까,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의 식량 사정은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먹고 싶었어 ?)
문 제는 저 위에서 언급한 324만톤이라는 식량이, 영국을 분명히 떠나기는 떠났으나, 그렇다고 다 프랑스 항구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독일 잠수함 작전이 효과적으로 운영되면서 서부 전선의 영국군도 배가 고파지기 시작합니다. 1916년이 되면서, 고기 배급량은 280그램에서 170그램으로 줄어어들었고, 나중에는 최전선이 아닌 부대에 대해서는, 3일에 한번 꼴로 고기가 배급됩니다. 하지만 실제 병사들이 느낀 것은 이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는 떼먹는 모양입니다.)
리처드 비즐리라는 병사의 병사의 회고입니다.
" 훈련소에서의 식사는 괜찮았어요. 그러나 프랑스에서 우리는 그냥 굶었지요. 거의 차와 건빵만 먹고 살았다니까요. 일주일에 한번 고기를 받으면 굉장히 재수가 좋은 거였는데, 그것도 물이 가득찬 참호에서 선 채로 시체썩는 냄새를 맡으며 그걸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1916년 겨울부터는 순무를 말려서 갈아만든 가루로 빵을 만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군이 이 모양이었으니, 독일은 더 상황이 심각했지요.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읽어보면, 독일군 병사가 투덜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침은 순무 샐러드, 점심은 순무 커틀릿, 저녁은 순무 스튜에요." 이것말고도 "서부 전선 이상없다"에는 줄기차게 순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무를 갈아서 만든 빵이라든지, 순무를 삶아서 네조각으로 나누어 먹는 이야기라든지...
자꾸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군대와 무우는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단, 미군은 제외.) 심지어 삼국지에도 무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갈량은 어디에 주둔하든지, 약간이라도 장기 주둔할 기미가 보이면 진영 옆에 밭을 갈고 무우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시면 매우 그럴 듯 합니다.
"첫째, 무우는
성장이 빨라서 금방 키워 먹을 수 있다. 둘째, 신선한 채소가 부족하기 쉬운 식단에 무우만큼 영양을 공급해주는 채소가
드물다. 세째,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익혀서 먹을 수도 있다. 네째, 값이 싼 것이라서, 혹시 금방 진영을 옮기게 되더라도,
밭에 심은 것을 별로 아까와하지 않고 버리고 갈 수 있다." 그래서 촉나라가 있던 사천성 사람들은 무우를 '제갈채'라고 부르며 즐겨먹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장동건,원빈 주연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1.4 후퇴 당시 장동건이 흘린 통 속에서 떼굴떼굴 굴러가던 무우가 기억나는군요.
(스웨덴하면 ABBA 말고도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 스웨덴 순무 !)
다 시 1차세계대전으로 되돌아와서, 월남전 당시 미군의 대표적 식량 C레이션처럼, 영국군의 대표적 군용 식량으로 알려진 깡통 중에 Maconochie(머카너키라고 읽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스튜 통조림인데, 속에는 묽은 고기 수프에 감자, 순무와 당근이 둥둥 떠있었습니다. 이걸 먹어본 소감 역시 병사들의 회고록에 남아 있습니다.
"따뜻할 때 먹으면 Maconochie도 먹을만 하지만, 차가운 채로 먹으면 man-killer다."
(영어 읽기 귀찮으신 분을 위한 번역)
머카너키 요리법
1. 머카너키 깡통을 딴다. 2. 기름이 표면에 뜰 때까지 약한 불로 데운다. 떠오른 기름은 플란넬 천으로 살짝 적셔 걷어내고, 이 기름묻은 천은 나중에 쓰기 위해 한쪽에 치워둔다. 3. 깡통에서 시커먼 덩어리를 따로 꺼낸다. 이건 감자다. (역주: 오 마이 갓 !) 4. 아까 챙겨둔 기름묻은 천으로부터 프라이팬에서 기름을 짜내고, 그 기름으로 감자를 약한 불에 볶는다. (역주: 정말... 가지가지 한다 !!) 5. 건조 야채를 두 주먹 정도 석회맛이 나는 물로 잘 개어 팬케익 모양으로 뭉친다. 감자를 볶고 나면 그 다음에 이 건조 야채 물에 갠 것을 볶는다. 6. 나머지 스튜를 데워서 법랑 접시에 감자, 야채와 함께 담는다.
왜 갑자기 Maconochie 이야기를 했냐하면, 바로 위의 인용된 말 때문입니다. 즉, 대개 최전선에서는 차가운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야전 취사반을 가능한한 최전선 근처에 두려고 노력을 했으나, 취사반은 적의 대포 사정권에 들어가기를 꺼려했으므로, 결국 아무리 빨리 조리된 식사를 참호로 배달해도, 결국 참호 속에서는 찬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에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참호 속에서 차가운 Maconochie를 먹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돈을 거두어 작은 풍로를 사기도 했습니다. 특히 영국인답게, 아침에 뜨거운 차를 마시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연료가 없어서 그나마 별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특히 연기가 나는 젖은 짚이나 나무를 쓸 경우, 당장 적 포병의 타겟이 되었으므로, 연기가 안나고 불붙이기가 쉬운 고체 알코올이 가장 선호되는 연료였습니다.
(햇볕도 잘 들고, 바닥은 잘 말라 있고, 따뜻한 음식이 준비되고 있는 아늑한 참호... 아마 홍보용 사진인 듯)
아 뭏든, 영국군 당국이 신문에 '전선의 영국군 병사들은 하루에 뜨거운 식사를 2번씩은 공급받는다'고 발표했을 때, 분노한 병사들의 항의 편지가 무려 20만통이나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 여러분들 기억못하실 것 같은데,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 포클랜드를 방문한 대처 수상에게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 병사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내용은 (역시나 !) 형편없는 식량 공급에 대한 것이었고, 단적인 예로 '배급된 계란이 최소 2개월은 지난 것'이라는 불평이 신문에도 게재되어 한동안 영국이 시끄러웠습니다. 영국은 정말 첫째,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고, 둘째, 먹는 것에 대해 불평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
위에서 말한 대로, 나폴레옹 시대와 1차 세계대전 때와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 바로 건빵 ! ( 건빵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4723535 참조 ) 다음은 영국군 포병대의 프레시 일병이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건빵이 너무 딱딱해서 단단한 것에 올려두고 돌같은 걸로 내리쳐서 깨어 먹어야 해요. 한번은 건빵은 손에 쥐고 벽돌로 된 벽의 날카로운 모퉁이를 내리쳤는데, 손만 다쳤어요."
철도가 주요 운송 수단이고, 트럭이 굴러다니는 시대였지만, 역시 후방에서 구워진 빵이 전선에 도착하는데는 8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구글에서 뒤져보니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군용 건빵이라는데... 나비스코 건빵 ?)
주 류의 경우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사정보다 약간 더 나빠졌습니다. 1차세계대전 때도, 영국군은 여전히 럼주를 배급받았습니다. 이론상으로는 1인당 약 68ml, 그러니까 250ml짜리 콜라병의 1/4 정도를 받았는데, 주로 추운 겨울 아침에 배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추운날 아침마다 큰수저로 1~2스푼씩" 받았다고 합니다. 프랑스군이나 독일군은 좀더 넉넉하게, 매일 포도주나 브랜디 배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독 일군 상황은 어떨까요 ? 다음은 독일군 폰 아르민 장군의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여기서 나열된 식품은 '실제 보급된 물품'이 아니고 '요청된 물품'이라는 것에 유의하십시요. 지루한 참호전 속에서, 독일군이 용감하게 프랑스군이나 영국군 참호로 돌격을 했던 것은 그 참호에 굴러다니는 고기 통조림을 빼앗으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는 것이 "서부 전선 이상없다"에 나옵니다.
(독일군 배급 장면인데... 뭐 꼭 군대 배급소가 아니라 동네 아줌마들 시장에 장보러 나온 것 같네요)
"모든 부대들이 만장일치로 식량 배급의 증량을 요구하고 있다. 빵, 러스크빵, 소시지, 깡통제 소시지, 깡통제 돼지기름, 베이컨, 깡통제 혹은 훈제 고기, 거기에 담배도 원한다. 또한 음식을 데울 고형 알코올도 꼭 필요하다.
또 한 많은 곳에서, 커피, 차, 코코아, 생수 같은 온갖 종류의 음료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한편으로는 소금에 절인 청어는 갈증을 유발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배급품으로 판명되었다. 따뜻하고 건조한 날씨에는 주류의 배급은 불필요하다."
(러스크가 뭔가 했더니... 단 빵이구만 !)
(바다의 밀이라는 별명이 붙은 유럽인의 생선, 청어를 절여서 말린 것)
위 를 보면, 확실히 독일인은 쇠고기보다는 돼지고기 소시지와 돼지비계를 좋아한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 또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인용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거기서 어떤 노련한 병사가, 어디선가 새우 통조림을 몇개 훔쳐오자, 동료들이 기뻐하면서도 돼지비계 통조림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ㅎㅎㅎ
(진짜 당시 미군들이 먹었던 리비 쇠고기 깡통. 콘 비프란 소금에 절인 쇠고기를 삶은 것입니다.)
미 군이 마침내 서부전선에 투입되면서 서부전선 전체의 식량 사정이 확~ 바뀝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자료 화면과 함께 어떤 미군 병사가 회고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여전히) 물구덩이인 참호 바닥에서 발을 적시지 않으려고 고기 통조림을 참호 바닥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미국의 물량은 후덜덜하지 않습니까 ?
* 이 글 중 상당 부분은 다음 싸이트의 내용을 번역한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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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간은 과거를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중요 교과목에는 반드시 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요. 실제로 많은 역사가 되풀이되었고, 이는 특히 주식 시장에서 그렇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에드워드 챈슬러라는 영국 기자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정말 놀랍다. 어떻게 똑같은 덫에 한번도 빼먹지 않고 걸린단 말인가 !" 지금처럼 금융 위기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정말 와닿는 이야기지요. 나폴레옹을 둘러싼 역사에서도 그렇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정말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나 폴레옹 전쟁이라고 하면 원래 1803년 아미앵 평화조약이 깨지면서부터 1815년 워털루 전투까지의 12년간의 전쟁을 뜻합니다. 사실 이 전쟁은 프랑스 대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1793년 제1차 동맹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스페인 등 주동)서 시작되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이나 이집트 원정까지 포함하면 거의 20년 동안의 전쟁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이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해봐...)
생 각해보면 유럽은 항상 전쟁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전역, 유럽의 전 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가장 치열하고 '악랄'한 전투와 약탈이 벌어졌던 30년 전쟁도, 주무대인 독일을 초토화시켰을 뿐,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는 직접적인 전쟁 피해에 휘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또, 전국민들에 대해 동원령이 선포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들과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 특정 지역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전화에 휘말렸습니다.
- 이는 나폴레옹 특유의 발로 뛰는 야구...아니 전투 때문인데, 기차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의 전투치고는 정말 짧은 기간에 정말 넓은 지역, 그러니까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러시아까지, 북쪽으로는 덴마크부터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까지 유럽 대륙 전체가 전장이 되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 하에서의 유럽 지도)
2. 유럽 뿐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전세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전쟁은 지중해, 대서양은 물론 카리브해와 인도양, 심지어 태평양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또한 이집트, 시리아, 이오니아 해의 여러 섬 등 유럽에서 가까운 지역 뿐만 아니라, 인도 대륙과 북미 대륙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이 여러가지 형태의 대리전을 벌였습니다.
(왜 이 영화의 부제가 "세계 저 반대쪽 편에서"인지 아시겠습니까 ?)
3. 최초로 총력전의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 프랑스의 경우, 워낙 압도적인 적군을 상대하려다보니 근대 최초로 국민 개병제의 개념을 도입하여 징집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로써, 전쟁은 어느 영주 및 그 식솔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프랑스 전 국민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국의 경우, 유럽의 군주국들을 부추겨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외 식민지가 필요했습니다. 프랑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국의 돈줄, 특히 인도와의 통상로를 위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로 인해 바로 위에 들었던 점, 즉 전세계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전쟁과 그 이전 전쟁의 다른 점을 몇개 늘어놓고 보니까, 제2차 세계대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제2차 세계대전과 나폴레옹 전쟁과의 유사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득권 세력 vs. 독재 혁명 세력
제 1차 세계대전은 사실 고만고만한 욕심꾸러기 깡패들의 패싸움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당시 미국이나 영국이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에 비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없었지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면, 정말 독일은 악의 제국이고, 그에 맞서 싸운 영국이나 미국은 정의의 화신처럼 그려집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늘날 대표적인 세계 위인 중의 하나로 떠받들어집니다만, 당대에는, 적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프랑스인들로부터도 전쟁광에 독재자로 불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나폴레옹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영웅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케사르, 징기스칸 등도 모두 당대 적국 사람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정당한 민주 정권이었고,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오리지널 군사 독재 정권이었으니까, 족보를 따져보면 나폴레옹이 히틀러보다 더 욕을 먹어야 합니다.
(쿠데타라는 말이 프랑스어라는 거 처음 알았어 ? 이 짓을 한 건 나지만 그 말을 만들어낸 건 영국놈들이야)
사 실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당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에 교묘하게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한 압박에다,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파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 상태였고, 어떻게든 그를 극복할 누군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히틀러는 반유태주의와, '게르만족의 정당한 권리'를 내세워 이를 실제로 극복했지요.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지만요.
(무슨 놈의 한자를 저렇게 많이 썼나... 무슨 권리를 요구한다고 ?)
어 쨌거나 당시 극심한 경제난과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탈하는 혁명적 과격 정권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그 세력의 전파를 틀어막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 이후 총재 정부의 혼란과 부패, 고질적인 재정 적자와 아시냐 지폐의 파탄 (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http://blog.daum.net/nasica/6862340 참조), 그리고 혁명을 꺾으려는 외국 군주들의 군사적 위협, 게다가 프랑스 국내의 왕당파들의 준동으로 인해 프랑스는 당시 절대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군사적 천재성으로 이 모든 위협을 한번에 해결해주었습니다.
(노골적인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한 전쟁, 이탈리아 원정 중 리볼리 전투)
문 제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자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 타국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인근 점령지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을 잔인하게 수탈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나폴레옹도 못지 않게 대륙의 유럽 국가들을 세금, 징집 및 전쟁 배상금의 명목으로 수탈했습니다. 특히 당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분할 점령되어 국가로서는 소멸 상태였던 폴란드의 경우는, 독립 국가로 재탄생시켜주겠다는 나폴레옹의 낚시에 걸려 '몸도 주고 마음도 주었지만' 결국 철저한 배신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폴레옹은 세계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고, 히틀러는 세계 악인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히 틀러가 욕을 먹는 점을 생각해보면, 유태인 학살, 비밀경찰, 게르만 극우 민족주의 등등 매우 많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사실 그 정도로 욕을 먹을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폴레옹도 비밀경찰을 운영했고, 언론 검열을 실시했으며, 노골적인 독재권력을 실시했습니다만, 유태인 학살이나 프랑스 민족 제1주의 등은 자행하지 않았지요. 사실 나폴레옹 휘하에는 그의 비전을 숭상하는 많은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폴란드인들이 복무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 행위에서 전범 행위에 해당하는 것들은 스페인 게릴라 전쟁에서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 행위 정도였습니다. 결국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 셈을 해보면, 히틀러가 저지른 온갖 악행과 나폴레옹의 악행은 비교가 안되지요.
(고야의 명작... 마드리드 5월 3일의 처형)
하 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닮은 점이 꽤 많습니다. 나폴레옹은 얼치기 작가적 소양이 있었고, 히틀러는 삼류 화가적 소양이 있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키가 좀 작았다는 점도 동일하네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대중 선동을 펼쳤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는 잘 아실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많은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은 다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가령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아래처럼 멋진 모습으로 넘었겠습니까 ?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을 때, 볼 품은 없어도 안정적이고 지구력이 좋은 노새를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으흥...?)
(으흥 !!)
2. 대륙 세력 vs. 해양 세력
나 폴레옹이나 히틀러나 영국에 대해서는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사실상 유럽 전역을 제패하고 자신의 지배를 강요할 수 있었지만, 바다를 제패한 영국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독일 공군을 동원하여 영국 도시들을 불태웠던 히틀러가 그나마 분풀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지요. 결국 나폴레옹 전쟁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나, 유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대륙 vs. 해양의 세력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 모두 결국 해양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뜻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제 생각에는 결국 전쟁은 총으로 한다기 보다는 돈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돈을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 결국 당시 부(富)는 유럽 대륙에서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해외 식민지로부터 수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17~18세기 들어 유럽이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유럽이 경제 문화적으로 더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무력이 더 강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결국 오늘날 유럽이 빛나는 문명을 이룩한 것은,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수탈한 부(富)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해외 식민지에서 자원을 쪽쪽 빨아들일 빨대, 즉 제해권을 가진 쪽이 결국 장기전에서는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뜬금없이 북아프리카는 왜 ?
나 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정말 특이한 공통점을 가집니다. 바로 북아프리카 작전입니다. 두 전쟁 모두 유럽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는데 정말 어이없게도 북아프리카 지역이 전화에 휘말렸던 것입니다. 왜 두 전쟁 모두 북아프리카를 그 시나리오에 포함시키게 되었을까요 ? 위에서 말한 점, 즉 대륙 vs. 해양의 대결이라는 점과 상관 있습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를 보지요. 독일이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작전을 펼쳤던 것은 우연과 필연이 합쳐진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독재자인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망상으로, 별 이유도 없이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본전도 못찾았던 것이 독일을 끌어들이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약간 망상이긴 했습니다만, 히틀러의 나름대로 원대한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즉, 한정된 자원 밖에 없던 유럽 대륙을 제패해봐야, 결국 영국의 물량전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히틀러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신생 터키 공화국을 압박하여 추축국 동맹에 끌어들이고, 더 나아가 남쪽으로부터 북진하여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유전지대를 점령한다는 꿈을 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왜 시작되었을까요 ? 이것도 놀랄 만큼 히틀러의 망상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표면적 대의명분은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로부터 이집트 민중을 해방시킨다든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로 문명을 되돌려준다든지 하는 터무니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개인의 야욕과 프랑스 총재 정부의 무모함이 합쳐진 결과이기는 했습니다만, 대신 당시 프랑스인들의 낭만주의와 창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역시 독일보다는 프랑스인들이 문화적으로는 더... (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져간 두가지, 대포와 OOO ? http://blog.daum.net/nasica/6862354 참조)
(근데 우린 여기 왜 온거야 ? 좀 뜬금 없쟎냐 ?)
나 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현실적인 (사실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만) 이유는 히틀러와 비슷했습니다. 즉, 영국의 돈줄이었던 인도로 가는 길을 닦겠다는, 오히려 히틀러보다도 더 황당하고,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에 문명을 되돌려준다는 표면적 대의명분보다도 더 어이없는 계획이었지요. 사실 나폴레옹은 소년 시절 읽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인도까지 도달하여 불멸의 영광을 이루고 싶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같은 대인물이 그런 황당한 계획을 세웠을 것 같지 않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오버질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랬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결국 영국의 육해군에 의해 그 꿈이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히틀러는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에서, 나폴레옹은 시리아의 생 장 다르크(아크레)에서 영국군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히틀러나 나폴레옹 모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영국의 로열 네이비였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저 생 장 다르크 요새 속에는 영국군 뿐만 아니라 내 사관학교 시절 원수 펠리포도 있단 말이다 !!!)
4.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히 틀러를 패배시킨 것은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었을까요, 피로 떡칠을 한 소련과의 동부 전선이었을까요 ? 나폴레옹을 결국 무너뜨린 것은 웰링턴 공작의 스페인 반도 전쟁이었을까요, 추위와 굶주림의 악몽으로 가득찬 모스크바 원정이었을까요 ?
정답은 이미 다 아실 것입니다. 영미 위주의 역사 교육과 영화, TV 드라마 속에서 성장한 우리들은 어릴 때는 모두 전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정답은 두 경우 모두 후자라는 것을 이제는 아실 것입니다.
히 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왜 러시아에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는 그냥 간단히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어에 딱 잘 어울리는 숙어가 있지요. 'Bite more than you can chew' (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베어물다) 입니다.
(와... 러시아가 넓기는 넓다)
사 실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은, 왜 히틀러나 나폴레옹이나, 씹기에는 너무 컸던 러시아에 쳐들어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경우, 정권의 태생적 속성상, 어차피 파시스트 정권과 공산주의 정권 사이에 평화란 있을 수 없는 것으므로, 좀더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는 좀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목을 조르기 위해 내린 대륙 봉쇄령을 러시아가 어기고 있어서, 동부 유럽으로부터 영국산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갔다가는 어차피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말라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폴레옹은 그 주체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갈증 때문에, 러시아로 쳐들어갔다고들 합니다. (심지어 당시 나폴레옹을 직접 수행했던 수하 장성들도 감히 나폴레옹 면전에서 그렇게 투덜거렸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나름대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다만 장기판에서의 상황을 한 수 더 내다볼 줄 알았기에, 러시아를 침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대부분의 전투는 방어적 성격이었을 뿐, 한번도 순수한 침략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은 없었다고까지 분석하더군요. (Franseschi 장군과 Weider라는 역사가가 쓴 "The Wars Against Napoleon"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읽었습니다. 나중에 읽는 대로 정리해서 올리지요.)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여름철 러시아의 진흙탕 바다와, 겨울철 러시아의 눈보라에 혼쭐이 난 이야기를 하면 사족이겠으므로 여기서 생략하시지요. 다만, 히틀러가 러시아에 쳐들어간 이유 중 하나가, '나폴레옹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내겠다'라는 개인적인 허영심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아 망했어요 망했어)
이 렇게 비교를 해보면, 정말 닮은 점이 많지요 ? 적어도 히틀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을 테니까, 나폴레옹의 패망 이유도 잘 알고 있었을텐데, 그와 비슷한 길을 걷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의아하기도 합니다. 알면서도 당한다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일까요 ?
http://gall.dcinside.com/worldwar2/4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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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해전갤에 올렸던 글인데 저 밑에 중동 석유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 이름은 워스파이트. 내 이야기 좀 들어볼래 ?)
위 사진 속의 전함은 20세기들어 가장 유명한 영국 해군 전함 중 하나인 워스파이트 (HMS Warspite) 호입니다. 영국 해군 전함 중 가장 유명한 전함은 아마도 후드 (HMS Hood) 호일 것입니다만, 그건 비스마르크 호에게 한방에 당했다는 불명예 때문이니, 그건 빼고 이야기하지요.
워스파이트 (Warspite) 호는 다음 두가지 점에서 20세기 초반 영국 해군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정점에 달했다가 몰락하는 영국 해군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
워 스파이트 호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해전인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여 독일 대양함대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지중해와 태평양 작전에도 모두 참여하여 독일 공군의 유도 폭탄인 FritzX를 3방이나 얻어맞기도 했지만 끝끝내 침몰하지 않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참고로 이탈리아 전함 로마 호는 단 두방의 FritzX에 침몰...)
(코드네임 FritzX, 정식 명칭 FX1400)
워 스파이트 호는 얻어맞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고, 노르웨이 연안 해전에서는 독일군 구축함들을 말아드셨고,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 해군 일소에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는 그야말로 포신이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 지원 포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중해 칼리브리아 해전에서, 이탈리아의 지울리오 케사레 호를 26,000 야드 거리에서의 명중시킨 것은, 움직이는 함정에서 움직이는 함정을 명중시킨 것으로는 역사상 가장 먼 거리의 명중탄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워 스파이트 호는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입니다. 한마디로, 영국 해군을 위해 만들어진 전함 중 당대 기준으로 가장 우수한 전함 클래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택에 디스커버리 채널의 Top10 수상 함정에도 올랐다는...) 배수량이 대략 3만톤인 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의 특징을 한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기존의 아이언 듀크 클래스급 전함보다 더 뛰어난 화력과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기존 장갑 능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 유는 2가지입니다. 먼저, 새로 개발된 15인치 주포를 장착하여, 기존의 13.5인치 포보다 포탑 수를 줄이고도 더 우월한 화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게를 줄여서 기존의 18개보다 더 많은, 24개의 보일러를 장착하여 기존 아이언 듀크 클래스의 21노트보다 더 빠른 25노트로 스피드도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보일러 수자를 늘렸다는 것만으로는 이렇게 고속 순양함에 해당하는 속도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중유(Fuel Oil) 보일러였습니다. 당시 전함들의 보일러는 석탄을 연료로 움직였습니다. 중유도 사용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석탄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지요. 중유 보일러는 석탄 보일러에 비해 보일러의 무게 및 연료 무게도 더 가벼왔고, 출력도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기존 아이언 듀크급 전함의 총 출력이 29,000 마력인데 비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은 무려 56,000 마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누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만든지 알아 ? 바로 나야 나)
하 지만 퀸 엘리자베스급이 도면에서 그려지고 있던 1912년 당시 영국 해군성의 수장인 윈스턴 처칠 경은 선뜻 중유 보일러를 채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석탄은 많이 났습니다만 석유는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 시다시피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조명용으로 등유(kerosIne)를 사용했습니다. 이 등유는 처음에는 석유에서 정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풍부하게 채굴되었던 석탄을 정제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도 석탄을 정제하여 가솔린과 디젤을 뽑아내었지요. 그러다가 1850년대 들어서서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 및 미국 펜실바니아 쪽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석유를 증류하여 등유 및 중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860년대에는 세계 석유 생산량의 90%가 카스피 해 연안,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 인근에서 채굴되었습니다. 즉, 당시 유럽 세계에서, 석유의 주공급원은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동유럽 쪽이었습니다.
(1891년 바쿠의 유정들...)
석 유는 중동에서 나는 거 아니냐고요 ? 맞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벽을 쌓는데도 천연 타르가 사용될 정도로, 중동에는 석유가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산업용으로 사용될 만한 진짜 유전이 터진 것은 20세기 들어서서 입니다. 가령 쿠웨이트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은 1938년이었습니다. 중동에서 가장 먼저 산업용 유전이 발견된 곳은 페르시아, 즉 이란이었습니다. 바로 1908년이었지요.
(이란에서의 석유 시추 성공을 알리는 1908년 6월 3일자 편지)
타 이밍이 기가 막혔습니다. 바로 3년 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설계도가 그려질 때, 영국 해군에게 갑자기 페르시아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 경은 의회를 설득하여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의 지분 51%를 사들입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원래 페르시아 지역은 19세기 초까지도 영국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금쪽같은 인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반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남하하며 페르시아를 계속 건드렸는데,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굴복하여 프랑스 편에 서느냐 영국과 연합하느냐에 따라 페르시아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에게 있어 페르시아는 인도로 가는 길목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이 취역하게 되면서, 페르시아는 영국 해군에게 있어, 더 나아가 대영제국의 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1, 2차 세계대전 내내 페르시아는 영국과 소련의 간섭에 시달리며 반점령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체 유전을 가지고 있던 소련보다는 영국의 간섭이 훨씬 심했습니다.
신이 페르시아, 즉 이란에게 준 선물인 석유는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정작 별 혜택을 주지 못하고, 영국-페르시아(이란) 석유회사를 통해 서방 세계로 빨려나갔습니다. 과거에 처칠이 투자한 영국 자본 때문이었지요. 요즘 이라크 석유는 미국의 핼리버턴 사가 다 빨아간다면서요 ? 그러다가, 마침내 이란에도 똑똑한 (혹은 멍청한) 정치가가 나타납니다. 바로 무하마드 모사데크 (Muhammad Mosaddeq) 였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전 저 책 안 읽었습니다.)
이 양반은 팔레비 왕조 하에서 민족주의 세력으로 가득찬 의회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는데, 당연히 대단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이 양반이 정말 똑똑하다고 (혹은 멍청하다고) 했던 것은 1951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위해 만들어진 영-이란 석유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 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비틀거리느라 노쇠함이 역력했던 영국을 물로 봤던 것이었지요. 사실 제대로 봤습니다. 영국은 일단 헤이그의 국제 사법 재판소에 이 사건에 대한 소송을 올렸다가 기각당했습니다. 대단한 떡을 빼앗긴 영국은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격노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가 '천조국' 미국에게 이란을 침공하자고 길길이 뛰었지만, 당시 세계의 제왕이었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 경찰 미국이 그걸 허용할 수는 없다'며 영국을 말렸습니다. 당시 트루먼은 한국 전쟁으로 가뜩이나 골치아팠는데, 소련을 자극할 여력이 없었지요. 더군다나 영국만 좋은 일을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
(미국 대통령 트루먼. 이 사람은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하 지만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칠 때는 군대로만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영국은 미국에게 모사데크가 소련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모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이란의 영웅이 된 모사데크는 내친 김에 서방의 푸들이나 다름없던 국왕을 강요하여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사건까지 터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정말 이란이 소련 쪽으로 넘어갈 것을 두려워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CIA 작전명 에이잭스(Ajax)를 승인합니다. 이 CIA 작전에 따라 이란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함마드 레자 국왕이 복귀했고, 모사데크는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CIA가 벌인 공작은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무섭다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알바생 동원 ! 국왕 만세를 외치며 폭력 시위를 벌인 알바생들을 거리에 풀어댔던 것입니다. 이렇게 알바생을 동원하여 분위기를 조성한 뒤, 미리 매수해둔 일부 군 병력으로 모사데크를 체포한 것이지요. 당시 길거리 소요에서 희생된 알바생들의 주머니에는 동일한 액수의 지폐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CIA 요원들이 현장에서 알바생들에게 봉투를 나눠줬던 모양이더라구요.
아무튼 이렇게 영-이란 석유회사를 되찾은 영국은 미국에게, 이란 석유의 40%를 떼주는 것으로 댓가를 치뤄줍니다. 결국 모든 것은 돈으로 연결되는 거지요.
(이때 영국-이란 석유회사는 British Petroleum Company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름이 낯설다고요 ? BP라고 하면 아마 좀더 익숙하실 겁니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결국 호메이니에 의한 이슬람 혁명, 이란 미 대사관의 인질 사태, 이란-이라크 전쟁, 9.11 사태,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자, 요즘 이란과 미국 사이가 다시 좋지 않습니다. 저는 이란에 핵무기가 있냐 없냐보다는, 이란에 석유가 많다는 사실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북한에서는 '내래 핵무기 만들었서라우'하며 아무리 떠들어봐야, 미국은 별로 신경을 안쓰쟎습니까 ?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전쟁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란과 미국 사이는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이렇게 세계적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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